호국의 달,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여행과 안보(安保)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휴전선 인근 지역이나 인천 옹진군 연평도처럼 포격의 상흔이 여전한 곳은 안보 여행지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기도 한다.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 같은, ‘평화롭다’는 말을 앞에 붙인 평택에도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곳이 있다. 평택항 외곽에 있는 해군 2함대 안보공원(서해수호관). 이곳에 가면 6·25 전쟁 이후에도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온 서해에서의 남북 교전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전투에서 희생된 장병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특히 천안함 피격 상황은 시뮬레이션으로도, 두 동강이 난 천안함의 처참한 모습까지도 살필 수 있다. 전쟁은 모든 걸 앗아간다는 점을 그동안의 서해 교전들은 가슴 깊이 새기게 한다.
해군 2함대 안보공원에서만 전쟁과 평화에 대해 되새기게 하는 건 아니다. 평택에는 곳곳에 ‘안보 전시장’이 있다.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대동법시행기념비 앞에서도, 원균 유적지에서도 임진왜란의 참상을 되돌아보고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해군 2함대와 대동법시행기념비, 원균 유적지는 평택의 서, 남, 동쪽 바깥 테두리에 걸쳐 있다. 마치 평택을 U자형 벨트로 감싸고 있는 방어선 같다.
평택 소사동. 아파트 숲 아래 농촌 마을로 접어들면 오래된 비각(碑閣)이 하나 있다. 일명 ‘대동법시행기념비’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육(金堉, 1580~1658)이 대동법 시행을 줄기차게 건의해 결국 충청도 지역에까지 확대할 수 있도록 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충청도 백성들이 세운 기념물이다. 비의 앞면 맨 위쪽에는 ‘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라 새겼다. 대동법은 조선의 조세 체계를 백성 본위로 개편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양반 신료들의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민생에 초점을 맞추었던 김육의 끈질긴 제안으로 전국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이 비가 평택에 세워지게 된 이유는 이곳이 그 옛날에도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남을 오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있는 곳을 소사(素沙) 마을이라 부른다. 흰 모래밭이라는 의미다. 평야가 넓어 소사벌이라고도 한다. 이 땅 역시 전쟁의 내력이 깊게 배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1597년 정유재란의 참상이 거세던 시기, 일본군이 남쪽 지역을 휩쓸고 삼남대로를 따라 평택까지 진출했을 때 명나라 군대가 이곳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름하여 소사벌대첩이라 한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협에서 대승을 거두기 10여 일 전이었다.
소사벌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중요 장소로 등장한다. 이때 역시 중국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이곳에서 맞부딪혔다. 성환전투라고도 불리는 청일전쟁 최초의 육전(陸戰)이다. 당시 일본군이 크게 이기면서 초반부터 청일전쟁의 향방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정유재란 때의 소사벌대첩이나 청일전쟁의 서막이 된 소사벌전투는 중국군과 일본군의 싸움이었다. 우리 땅에서 외국군들이 전쟁을 벌인 거였다. 둘 다 우리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평택 소사벌에서는 나라가 약하고 분열하면 외세가 밀고 들어온다는 점을, 아픈 역사는 우리가 그것을 잊고 있을 때 반복된다는 걸 소사벌은 깨우쳐 준다.
임진왜란과 관련해 늘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과 대비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원균(元均, 1540~1597) 장군의 묘와 사당 등도 평택에 있다. 원균 장군 묘에 어린 전설이 하나 전한다.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며 원균 장군이 전사하자 장군의 애마가 신발과 담뱃대를 물고 고향 집까지 천릿길을 달려 장군의 전사 소식을 전한 뒤 죽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그 신발과 담뱃대 등 유품을 넣어 묘를 조성했다고 한다. 묘역 아래에는 애마총(愛馬塚)이라는 그 말을 위한 작은 무덤도 만들었다. 원균 장군 유적지는 평택에서 멀지 않은 충남 아산시 음봉면의 이순신 장군 묘역과 연결해 찾아봄도 역사의 토론장으로써 좋은 코스다.
평택에서는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기틀을 다진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유적지도 둘러볼 수 있다. 정도전의 시문을 모은 삼봉집(三峰集)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삼봉기념관을 비롯해 삼봉의 위패를 모신 사당, 삼봉 문학관 등이 있다. 삼봉집 목판은 정조 임금 때(1791년)에 왕명에 의해 대구 지방에서 간행되어 대구 용연사에서 보관해 오다가 1912년 삼봉의 후손이 세거지(世居地)인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삼봉집 목판은 글자 새김이 정교해 조선시대 인쇄문화 연구에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