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광주

안온이 깃든 광주

다시, 오월이 왔다. 광주의 오월은,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명사화된 ‘오월 광주’는,
잊어서는 안 될 ‘굴곡진 현대사’의 한 페이지고, 잊을 수도 없는 ‘투쟁의 기억’이다.
지금껏 그 기억 선명하지만 이번엔 부러 살짝 비켜가기로 했다.
‘5·18’이란 키워드에서 한 발 떨어져 만난 광주의 남은 절반은 밝고 근사했으며, 마음에 여유로 맺혔다.
그 몇몇 곳 중 특별히 느리게 걸어 누비기 좋고 봄 냄새 물큰 도는 4곳을 가려 뽑았다.

📝&📷 이시목 여행작가

scroll Down

Scroll Down

도서관 계단에 걸터앉아 누리는 봄 햇살

시간은 단절돼 있지 않다. 연속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도 흐르는 시간 안에 있다. ‘옛 전남도청(이하 도청)’이라는 굵직한 현대사의 한 획을 그러안은 ‘과거의 공간’이면서 지금에 있다. 도청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거점공간이자 최후의 항전지였던 곳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은 이 귀한 공간의 역사적 가치를 안고 2015년 출발했다.

민주와 인권의 가치가 담긴 광주의 상징물들을 압도하지 않기 위해 도청 건물 아래에 둥지를 틀었고, 땅을 깊게 파낸 듯한 건축 구조 덕분에 주변이 온통 도로임에도 고요하고 여유롭다. 개관 20여 년이 흐른 지금엔 당시 심은 나무들까지 부쩍 자라 숲이 제법 울창하다. 마치 ‘도시 속 섬’처럼. 그래서일까. ACC는 과거와 잇닿아 있지만 현재와 미래 사이 어디쯤의 독립 공간으로 읽힌다.
무릇, 소문난 문화도시에는 도시의 품격과 지역성을 보여주는 복합문화공간이 많다. 광주에서는 ACC가 대표적이다. 장소적 의미가 큰 건물과 함께 있어 가끔 역사 공간으로 오해받지만 ACC는 엄연한 문화공간이다. 아시아를 주제로 한 다양한 문화예술과 생활문화를 만나는 도서관이자 기록관이며 박물관인 곳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여기에 전시관과 공연장 등이 결합된 형태다.

이 중 도서관과 박물관, 기록관 등을 아울러 부르던 라이브러리파크가 지난 2021년 리모델링됐다. 아시아문화박물관(아시아문화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분위기도 싹 바뀌었다. 상상해 보라. 개방식 서가에 비치된 아시아 각국의 문화예술 서적을 골라, 시야가 확 트인 자리에 앉아 자유롭게 책을 읽는 풍경을. 심지어 도서관존 내의 계단식 공연장에서는 계단에 걸터앉아 멍을 때리기도 하고 누워 책을 읽기도 한다. 도서관이나 박물관이라기보다는 근사한 카페인 듯 분위기가 쾌적하고 트랜디하다.
공간만 핫해진 것이 아니다. 요즘 ACC에서 기획하는 전시마다 대박 행진이다. 복합전시 1관에서 열리고 있는 <디어 바바뇨냐: 해항도시 속 혼합문화>(~06. 16.)도, 2관에서 열리는 <이음 지음>(~07. 21.) 등도 호평 속에 찾는 발길이 꾸준하다. 특히 둥글고 푸른 수조 위에 180개의 백자 그릇이 자유롭게 떠돌다 툭툭 부딪히며 청아한 소리를 내는 ‘이음 지음’ 전시장은, 오감을 자극하는 체험형 전시로 인기몰이 중이다. ACC의 이 같은 변화로 요즘 ACC는 그야말로 MZ세대의 새로운 놀이터가 됐다.

언제나 몇 번이라도 찾아 걷고픈 양림동

핫하기로는 양림동도 ACC 못잖다. 근대로 타임슬립한 듯 모던한 느낌이 다분한 양림동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또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예술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근대 시기 광주’의 얼굴이다. 아니, 근대의 얼굴이면서도, 근대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지속적으로 담아가고 있는 시간의 그릇이다. 오늘 양림동을 걷는다는 건 그래서 그 모든 복합적인 시간과 공간의 층위를 구분 없이 둘러본다는 뜻이다.

테마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근대건축물과 미술관, 펭귄마을, 미디어아트. 대부분 펭귄마을에서 걷기 시작해 한희원 미술관~이장우 가옥~오웬기념각~우일선 선교사 사택~이이남스튜디오~사직공원을 걸어 누비는데, 모든 스폿이 오래 머물며 즐기기에 좋아 하루해가 짧다. 이럴 땐 몇몇 특징적인 곳만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광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인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도심 속 피크닉 명소로, 정크아크가 인상적인 펭귄마을은 사진 찍기 좋은 골목으로, 100년 남짓한 세월의 이장우 가옥은 넋 놓기 좋은 툇마루로 즐기는 것이 적절하다.

해 질 녘엔 광주의 미디어아트 대표주자인 사직공원도 필수 산책 코스다. 사직공원은 지난해 11월 점등식을 시작한 ‘사직 빛의 숲’이 펼쳐지는 자리로, 밤이 되면 공원 내 산책로 830m 구간 전체가 빛으로 찬란해진다. 반딧불이처럼 날아다니기도 하고 물결처럼 출렁대고 하늘로 발사되기도 하는 빛의 무리들. 그 가운데 G타워(사직공원 전망타워)가 있다. 영화에서 보던 UFO처럼 독특하게 생긴 G타워는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아니 그 이상의 하늘로까지 빛으로 물드는 매혹의 정점이다. 전망대에 서서 밤하늘에 긴 궤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레이저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타워 바깥에서 빛 자체가 되는 타워를 감상하는 시간도 좋다.

계절의 냄새를 온전히 느끼는 물가 산책

도심을 벗어나면 광주는 도시란 이름을 충분히 잊게 만든다. 그저 산이고 숲이고 호수일 만큼 깊고 맑고 투명해, 어디서건 계절의 냄새가 온전하게 담긴다. 특히 물가 풍경이 안온해 오래 머물며 거닐기 좋다. 추천 물가는 제1수원지와 광주호 호수생태원이다. 무등산 자락 깊지 않은 숲 안에 폭 담기듯 자리한 제1수원지는 편백나무숲이 울창한 곳이고,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습지식물들이 뿜어내는 초록의 생기가 남다른 곳이다.

제1수원지부터 찾는다. 제1수원지는 100여 년 전 조성된 광주의 첫 번째 수원지, 딱 그만큼의 나이로 자라는 편백나무 숲을 끼고 있어 예부터 ‘원시림 안에 깃든 호수’로 불려왔다. 그만큼 호수 주변 숲이 너르고 빽빽해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다. 수원지 주변 숲을 거닌 후엔 의재미술관까지 걸어보는 것도 좋다. 자연 속에 묻힌 의재미술관에서 허백련 선생의 삶과 작품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미술관 가는 동안 만나는 초록의 그늘도 마음에 선물 같은 여운을 준다.

제1수원지가 ‘산의 정취’를 즐기기 좋은 호수라면,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완벽한 물가다. 생태원 자체가 품은 초록도 넓고 깊은데, 지난해 가을 누리길 완전 개통으로 거닐 수 있는 물가가 한층 넓어졌다. 누리길은 광주호 둘레를 따라 설치된 편도 4.6km 길이의 수변 데크길로, 갔던 길을 그대로 되밟아 와야 하는 편도 코스지만, 수종을 달리하며 이어지는 초록 그늘과 그 그늘에서 맞는 오월의 바람 맛이 좋아 걷는 맛이 각별하다. 파란 호수와 초록의 숲 사이를 내처 걸어서일까. ‘바람이 사는 숲’을 잠시 빌려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