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투데이

‘아네모이아’까지 온 대 복고시대

요즘 ‘아네모이아(anemoia)’라는 생소한 단어가 트렌드 키워드로 거론되고 있다.
아네모이아는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라는 뜻으로,
살아보지도 않았던 오래전 과거를 추억한다는 뜻이다.

📝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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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복고시대가 시작됐다

우리는 지금 대 복고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시대 최대 유행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복고는 보통 자신이 경험한 과거에 대한 향수를 뜻한다. 그래서 주로 기성세대에게 나타나는 트렌드이기도 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21세기 복고 열풍의 주역은 젊은 세대다. 인터넷을 매개로 복고 트렌드를 이끄는 젊은 세대라니, 이상한 일이다. 젊은 세대는 과거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 시절을 추억한단 말인가? 바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네모이아’다. 요즘 젊은 세대에겐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도 향수의 대상이 된다.
2007년에 원더걸스 ‘텔미’ 열풍이 불었다. 작곡가인 박진영이 본인의 추억을 투영해 만든 노래였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복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2010년대 말경부터 젊은 세대가 스스로 과거 콘텐츠를 찾아내 열광하기 시작했다. 당시 SBS가 'SBS 클래식'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열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방영된 〈SBS 인기가요〉를 24시간 공개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향이 나타났다. 라이브방송 실시간 동시접속자 수가 2만 명을 돌파할 정도의 인기를 끌자 KBS도 추억의 음악방송 〈가요톱10〉을 내보내는 '어게인 가요톱10' 채널을 개설했다.
이때 등장한 키워드가 ‘온라인 탑골공원’이다. 노년층이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탑골공원처럼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온라인 콘텐츠라는 의미에서 온라인 탑골공원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탑골공원에 모이는 노년층은 온라인 탑골공원이라는 신조어를 몰랐다. 젊은 층 사이에서 나타난 유행이었다.

신조어부터 과자까지, 트렌드의 핵심이 되다

이즈음 ‘뉴트로’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기존의 복고는 기성세대가 추억을 찾는 ‘레트로’였는데, 최신 복고는 젊은 세대가 모르는 과거를 새롭게 즐긴다는 의미에서 ‘뉴트로’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성세대에 익숙한 과거의 키워드들이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부활했다. 곰표밀가루 브랜드의 디자인을 다른 신상품 디자인에 활용한다든가, 진로 소주의 과거 디자인을 현대화해 재출시하는 식이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골목길도 핫플레이스로 떴다. 서울 구도심의 익선동과 을지로 골목이 대표적이다. 특히 과거 느낌의 다방 등이 남아있는 을지로 골목은 ‘힙지로(힙스터+을지로)’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당(堂), ○○옥(屋), ○○상회(商會)'와 같은 옛날식 이름을 쓰는 업소들도 생겨났다. 1970~80년대 분식집에서 사용하던 초록색 점박이 플라스틱 접시 등을 배치한 카페가 등장하고 과거 제품 로고가 박힌 유리컵도 인기를 끌었다. 특히,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새겨진 컵은 '레어템' 대접을 받았다.
‘할매니얼’이라는 신조어도 부각됐다. 할머니와 밀레니얼(1982~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을 합친 단어로 할머니, 할아버지 입맛을 가진 밀레니얼 세대라는 뜻이다. 젊은 층 사이의 카페 트렌드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는 ‘음식’이다. 음식은 트렌드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주목받는데, 특히 카페 디저트가 트렌드의 중심에 있다. 그런 카페 디저트 재료로 흑임자, 쑥, 인절미 등의 전통 먹을거리가 떠올랐다. 이것이 바로 할매니얼 현상이다.
각 업계도 트렌드를 쫓았다. 빙그레는 팥맛 아이스바 ‘비비빅’을 변형하여 인절미, 흑임자, 단호박 맛을 내놨다. 롯데푸드의 ‘빵빠레 흑임자’, 해태제과 ‘쌍쌍바 미숫가루’ 등 다양한 할매니얼 아이스크림이 쏟아졌다. 과자 업계에서도 오리온이 '찰 초코파이 흑임자·인절미'를 출시해 3개월 만에 1,500만 개를 팔았고 해태제과는 '오예스 미숫가루라테'를 선보였다. 우유 업계에선 서울우유협동조합이 ‘흑임자·귀리 우유’를, 푸르밀은 ‘미숫가루 우유’를 내놨다. GS리테일 관계자는 "2030 젊은 세대가 레트로 아이템에 열광하고 있다. 할매니얼 현상도 힙지로와 같은 뉴트로 트렌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카메라를 찾는 요즘 세대

이런 현상 속에서 등장한 것이 Y2K 유행이다. Y2K에서 Y는 연도(year), K는 1000이라는 뜻의 킬로(kilo)를 의미한다. 즉 ‘2000년’이라는 뜻이다. 이는 1999년, 밀레니엄 버그(millennium bug)라는 의미로 쓰였다. 과거에는 연도를 표기할 때 ‘88올림픽’처럼 마지막 두 자리만 썼다. 이런 식이면 2000년은 ‘00’이 되는데, 컴퓨터가 이를 ‘0년’으로 인식하면서 오류를 일으킨다는 것이 밀레니엄 버그의 주장이었다. 그로 인한 컴퓨터 오작동으로 대재앙이 닥칠 거라는 공포가 엄습했지만, 해프닝으로 끝나며 Y2K라는 신조어를 남겼다.
Z세대가 9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시대에 주목하면서 해당 시기를 Y2K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Z세대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났기 때문에 해당 시기에 대한 추억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당시에 살았던 것처럼 그 시대를 계속 소환하자, 결국 ‘아네모이아’라는 낯선 단어까지 떠오르게 된 것이다.
Y2K 트렌드의 출발은 미국영화 1996년 작 〈클루리스〉다. Z세대는 작품의 알록달록하고 화사한 분위기에 반응했다. 이러한 유행에 따라 1990~2000년대 문화 코드를 소환하는 트렌드를 포괄적으로 Y2K라고 부르게 됐다. 걸그룹 뉴진스가 ‘Ditto’ 뮤직비디오에서 1990년대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도 Y2K가 된 것이다.
Y2K에 대한 아네모이아 현상은 최근 더욱 뜨거워졌다. 190개 국가에서 서비스되는 매칭앱 ‘틴더’는 최근 젊은 세대의 데이트 트렌드를 발표했는데, 그 안에도 ‘Y2K 등 겪어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뜻하는 아네모이아’가 포함됐다. 1억 화소 스마트폰에 밀려 폐기됐던 구형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의 색감, 화질이 오히려 핫한 감성으로 받아들여지며 다시금 인기를 끌고 과거의 패션 브랜드들이 재출시되어 관심을 받거나 동묘 구제시장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등이다.

디지털 혁명과 복고시대의 공존

복고, 뉴트로, 온라인 탑골공원, 할매니얼, Y2K 등의 키워드가 대두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장기간 이런 흐름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고, 이젠 아네모이아라는 말까지 쓰인다. 이는 이것이 하루아침에 끝날 반짝 유행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서두에 ‘우리는 지금 대 복고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 것이다.
젊은 세대는 과거를 모른다. 그래서 그들에게 과거는 새롭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바뀌어 가기 때문에 아날로그의 과거가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특히 디지털 세대인 Z세대는 이러한 아날로그 분위기를 오히려 ‘쿨’하게 느낀다. 흔치 않으니 개성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또 각박한 세상에 잠시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위안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시절을 살진 않았지만, 왠지 아련하게 힐링이 되는 듯한 느낌도 받는다. 과거의 신기한 모습들은 유희의 소재도 된다. 9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는 대중문화 혁명이 나타났다. 그때의 역동적인 콘텐츠들은 지금 봐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적당히 낯설면서 적당히 동질적이다. 이러니 복고 열풍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Y2K 시대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기승을 부릴수록 옛것의 가치도 커진다. 그러므로 디지털 혁명과 대 복고시대의 공존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