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심리학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이 곧 한 해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하지만 올해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아직 제대로 시작한 것 같지도 않아 마무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얼떨떨하다. 게다가 연말을 맞아 더욱 얄팍해진 지갑과 잔고가 얼마 남아있지 않은 통장도 면구스럽다. '올해는 꼭 재테크에 성공해서 전세자금 대출을 갚아야지' 했던 연초의 다짐은 잊힌 지 오래고, 다가오는 연말연시에 여기저기 목돈 들어갈 일만 많아 걱정이다. 어느 현자가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했다는데, 진짜 현자가 맞는가 싶다. 한 코미디언은 현자의 말을 받아쳐 이렇게 말했다. "행복이 다 무슨 소용이죠? 행복으로는 돈을 살 수 없는데요!" 재치 있는 말이지만, 사실 둘 다 틀렸다.
[글 유지현 (진화인류학자)]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
긍정심리학자 소냐 류보머스키는 돈이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수긍하기 어려운 이유가 돈이 실제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 연구와 실험에 의하면, 돈은 분명히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통계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돈과 행복에 대한 두 번째 사실은, 돈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나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적고, 그렇게 오래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특히 재산이 일정 수준 이상인 경우 돈은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드라마나 뉴스에 나오는 부자들이 딱히 행복한 표정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은 항상 돈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 하지만 우리 같은 필부필부가 돈이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정 수준'의 재산을 갖기란 로또 당첨이나 돼야 가능한 일이니, 그때까지, 돈은 분명 행복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 재기 넘치는 코미디언의 말과는 달리 돈과 행복의 인과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이다. 행복한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대학 학부 시절 더 행복하다고 말한 학생들이 이후에 사회생활에서 소득이나 다른 경제적 능력 등이 더 높은 경향이 있다.
욕망의 수단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도대체 돈이 뭐기에 이렇게 우리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아직 돈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불행했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행복했을까?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돈 때문에 괴로운 걸까? 물물교환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교환 수단으로서 돈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뻔한 이야기다. 몇몇 인류학자들은 조금 다른 곳에서 돈의 기원을 찾는다. 얼마 전 작고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빚(부채)이 돈보다 훨씬 앞서 존재했으며, 돈은 빚을 갚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주화의 등장보다 수천 년 앞서 고대 수메르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 물표에는 이를 소지한 사람이 추수 때 얼마만큼의 보리를 받는지, 또는 만기 때 일정 양의 은을 받는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요즘 우리가 신용카드 회사에 빚을 갚기 위한 수단으로 돈이 필요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에 이러한 점토 물표는 지금의 신용 화폐처럼 은이나 금 등의 귀금속보다 폭넓게 사용됐다고 한다.
돈에 대한 또 다른 초기 기록에는 '자유인이 다른 자유인을 때리면 은 1마누의 돈으로 물어준다', '천민의 눈을 다치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린 사람은 은 1마누를 내야한다' 등의 함무라비 법전이나 남성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 신부 가족에게 주는 '신부대', 신전이나 왕에게 바치는 '공납' 등이 있다. 아마도 원시적인 돈은 물건을 사고파는데 쓰이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거나 관계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던 것 같다. 정말 돈은 그 태생부터 '돈이면 다 되'게 하려고 만들어진 물건인가보다. 기원이야 어찌 됐든 돈은 결국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고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도 쓰이게 됐고, 이제 돈은 물건의 가격뿐 아니라 연봉처럼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수단으로까지 확장됐다. 인간관계의 문제든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얻는 수단이든, 돈이 너무나 잘 해결해낸 까닭에 이제 우리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돈으로 추상화할 수 있게 됐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인간의 행복에 필요한 것들을 돈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돈을 욕망의 수단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바꿔 놓았다.
돈이 우리에게 준 것과 가져간 것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호혜적인 교환 거래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만이 보이는 독특한 활동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이 특별한 능력을 화폐는 더욱 강화했다. 효율적인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돈이 없었으면 오늘날 세계 경제가 이렇게 거대하고 복잡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교환이 중요한 이유는 전문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돈을 통해 가능해진 거대한 교환의 네트워크는 더욱 정교한 전문화와 분업을 가능하게 했고, 인류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자식과 부모 사이, 부족민과 족장 사이, 또는 낯선 타인들 간에 도움을 받고 나중에 다시 도움으로서 그 빚을 갚아야하는 인간관계에서의 부채는 사회적 의무이자 공동체를 묶어주던 유대감이기도 했다. 돈으로서 마음의 부채를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인간관계는 더 이상 상호 간의 마음의 빚으로 꽁꽁 묶여 있지 않다. 더욱이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조상들은 부를 저장할 마땅한 수단도 없었다. 남은 음식은 금방 썩기 일쑤고, 오늘 사냥에 성공했다한들 내일도 사냥에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으며, 자원은 그때그때 운에 따라 얻어졌다.
선조들에게 잉여 자원을 축적할 수 있는 장소는 다른 사람의 뱃속뿐이었을 것이다. 내가 형편이 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 도와주면 언젠가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이 나에게 진 빚을 갚을 것이다. 물론 도움을 받은 사람이 배신하거나 끝까지 나를 도울 형편이 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반면, 돈은 더 안정적인 잉여 자원의 저장 수단이 됐다. 더 이상 사람들은 타인을 믿는 데서 오는 위험부담을 질 필요가 없어졌다. 인간이 낯선 타인과도 협력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상호 신뢰와 연대는 오늘날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돈보다 중요한 것들
그렇지만 '돈만 있으면 행복할 텐데'라는 생각은 틀렸다. 돈보다 우리 행복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다른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사랑하는 가족과 친밀한 친구들, 사회적 지위와 명예,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건강 등등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데 돈만 없어서 불행하다면 모를까, 다른 모든 것들 없이 돈만 있다고 해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돈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다른 모든 것들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에 인간 욕망의 총화가 됐지만, 사실 돈 그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아닌 이상 금고에 가득 찬 돈을 보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요즘은 더욱이 돈이 은행 통장이나 휴대폰 화면 속에 깨알만 한 숫자로 찍혀 있을 뿐이어서, 이래선 제아무리 스크루지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장고와 월급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추천하는 방법은 물건보다는 관계나 경험에 돈을 쓰는 것이다. 돈이 쓰이게 된 최초의 이유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를 뒷받침하듯 사람들은 동일한 금액이라도 나를 위해 소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했을 때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를 맞아 부모님, 친구, 어린 조카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해보자. 비싼 선물일 필요도 없다. 아마 받는 사람보다 당신이 더 큰 행복감과 만족감을 얻게 될지 모른다. 경험 역시 물건보다 본질적으로 더 사회적이다. 경험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고, 공유하고, 추억하면서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친구에게 새로 산 시계를 자랑하는 것보다는 친구와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며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와인잔을 기울이는 것이 오래도록 우정을 돈독히 만들어 줄 것이다.
공돈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문제를 다룬 영화 셋
빅쇼트
은행이 개인에게 제로금리로 주택담보대출을 내주고, 개인은 대출받아 집을 사들이던 2005년의 미국, 부동산 시장의 과열된 움직임에 의문을 품던 각기 다른 4팀의 투자자들이 이것이 곧 부실임을 눈치챈다. 모두를 속이고 돈 잔치를 벌인 은행들과 이를 정확히 간파한 4명의 괴짜가 세계 경제를 판돈으로 위험한 도박을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은 주가 하락에 베팅을 하는 공매도를 뜻하는 주식용어로, 2005년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던 서브프라임 사태를 예견하고 가치가 하락하는 쪽에 집중 투자해 엄청난 자산가가 된 펀드매니저들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경제 용어를 공부하고 보면 더욱 흥미롭다.
언컷 젬스
미국 뉴욕의 보석상 하워드 래트너의 일상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시달리는 게 일이기 때문. 그 많은 빚은 도박 중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빚더미를 해결하기 위해 매번 일을 벌이지만 계획은 자꾸만 꼬여간다.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빚을 한 방에 청산할 거대한 '한탕'을 준비한다. 그것은 바로 2년 전 에티오피아 광산에서 채굴한 오팔 원석을 100만 달러에 낙찰받는 것! 과연 그의 뜻대로 흘러갈까? 돈을 좇는 자의 끝, 이미 우리가 짐작하고 있는 그 허무한 끝을 향해 달려가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담았다.
올 더 머니
석유 사업으로 세계 최고 부자가 된 J. 폴 게티를 상대로 1973년 7월 10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게티 3세 유괴 사건이 발생한다. 유괴범은 당시 몸값으로 1,700만 달러(186억 원)를 요구했지만 게티는 유괴된 손자 말고도 14명의 손자가 더 있다는 이유로 몸값 지급을 거부한다. 며느리 게일은 유괴된 아들을 찾기 위해 게티와 팽팽하게 맞서고, 게티는 손주가 5개월여 납치범에게 끌려 다니는 상황에서도 고가의 예술품을 사들인다. 결국 유괴범은 몸값을 낮춰 받고 게티 3세를 풀어주지만 손자는 악몽 같은 기억을 쉬이 지우지 못한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재벌 3세 유괴 사건을 다룬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