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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계주

삶에 값어치를 더하는 일

[글 삼척남기지본부 계전보전부 정진욱 대리]



#1

꽤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2014년의 일인 듯싶다. 친구들과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가 영국 히드로공항에서 하룻밤 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른 아침 출발하는 항공편 일정에 맞추려면 노숙 아닌 노숙을 해야 했다. 평소 잠자리에 굉장히 예민한 나는 의자에서 자다가 너무 불편해서 구석진 온풍기 뒤에 숨어서 잠을 청했다. 사람들 눈에도 쉽게 띄지 않는 곳이어서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잘 수 있었다. 다행히 크게 뒤척이지도 않고 잘 자고 일어났는데, 아뿔싸! 문제가 생겼다. 시계를 보니 비행기 출발 15분전이었다. 역시 끼리끼리 논다고 좋은 친구들을 둔 덕분에 비행기를 놓칠 추억(?)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히죽거리며 친구들을 찾았다. 물론 늦게 일어난 건 내 책임이 아니라 날 깨우지 않은 친구들 탓이니. 그런데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히드로공항이 인천국제공항처럼 넓은 공항도 아니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친구들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원망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려고 가보니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신이란 신은 그때 다 찾은 것 같다. 물론 나는 무교다. 맨 앞에 선한 인상의 아주머니에게 더듬거리는 영어 실력으로 양해를 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어차피 줄을 기다리고 서 있어도 비행기 놓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판단해 일단 의자에 앉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방법은 최대한 빠른 항공편을 예매하는 것뿐이었다. 20만 원짜리 티켓을 끊고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지금 기준으로 제주도를 4번 왕복할 금액이었다. 이미 예매한 비행기 티켓과 숙박비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할 정도였다. 그나마 이 정도 손해도 다행이지 싶었다. 게으른 성격 탓에 여행 일정 짜는 것도 귀찮아하고 숙박도 하루 이틀 전에 예약하곤 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것저것 합치면 30~40만 원은 날린듯하다. 사실 그동안은 타지 못한 항공료만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비용을 따져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손해 본 것 같아 굉장히 속이 쓰리다. 예매를 끝내고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을 켰다. 공항 안에서 와이파이를 쓰려면 돈을 내야만 했지만 신기하게도 메신저는 연결이 됐다. 무사히 친구들과 만나 모든 원망을 다 듣고는 여행 일정을 논의했다. 물론 다음 비행기는 제대로 타고 핀란드 탐페레로 넘어갔다. '내돈 내고 가는 여행조차도 이렇게 어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 약속을 잘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전에는 약속 시간을 곧잘 어기곤 했지만, 그 이후로는 최소 5~10분 전에 약속장소에 도착하려고 애쓴다.

배낭여행

#2

12월 31일. 올해도 마지막이다. 대학교 4학년 2학기인 지금, 친구들 모두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비행기 놓치고 이 먼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터지는 폭죽을 구경하고 있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영어로 숫자를 세면서 새해를 맞이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폭죽이 터진다. 대구 본가에서 볼 수 있는 미군들이 쏘아올리는 폭죽보다 훨씬 못하다. 옆에서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안아주고, 연인들은 뜨거운 키스를 나눈다. 나도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근데 갑자기 날이 추워지면서 눈이 시리다. 여행은 혼자 가는 것도 좋지만, 같이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밤하늘 폭죽

#3

리버풀 축구팀을 응원한 지는 꽤 오래 됐다. 중학교 때부터 응원했으니 거의 20년이 돼간다. 고등학교 때가 되니 여기저기서 중계도 많아지고 같은 팀을 응원하는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팀이 지면 하루가 짜증날 정도다. 그런 감정으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상상에 빠지며. '내가 저기 피치 위에 있으면 어떤 세레머니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경기장에는 나 같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전부 목소리가 터져라 응원했고, 선수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선수들이 잘하면 박수를 쳐주기도 했지만, 답답한 경기를 펼치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좋아하는 팀 경기를 3개나 봤다. 그런데 축구 경기를 보면 볼수록 뭔가 굉장히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기대보다 짜릿한 기분을 느끼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계속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공간에 있어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깨달았다. '그곳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구나.' 그 이후로 축구 경기를 자주 챙겨보진 않는다. 고작 하이라이트를 보는 정도다. 사실 유명 축구선수들도 자신과 관련된 경기 외에는 잘 보지 않는다고 들었다. 물론 직업인 사람과는 굉장히 다르겠지만, 비슷한 생각이지 않을까? 직접 공을 차는 게 중요하지 다른 사람의 경기를 보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무얼 하건 신경 쓰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못하던 잘하던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것이라고 말이다.

축구경기 응원

#4

내가 좋아하는 사람 집 앞에 10분 먼저 도착해서 그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고, 굳이 먼 해외로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좋아하는 길을 드라이브하거나 조그마한 산책길을 걷는 것도 행운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랑스러운 장면을 보는 것보다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다.

연인

※ 다음호 필봉계주 주자는 삼삼척기지본부 기계보전부 이영진 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