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봉계주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은 내가 속한 곳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기분을 안겨준다. 직장, 연애, 대인관계, 돈, 자기계발 등의 모든 고민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감각으로 다른 장소, 문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온전한 해방과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가로수, 도로의 표지판, 가로등, 보도블록 등 작은것에서부터 시작해 다른 생김새, 색다른 맛의 음식,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등 사소한 부분까지도 평소 접했던 것과는 다른 아주 생경한 곳이라야 한다.
[글 부산경남지역본부 건설사무소 정서영 주임]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나 자신을 위한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다. 전혀 다른 곳에서 이방인으로서 현실에 간섭받지 않는 짧은 순간을 누리고자 선택한 곳은 스페인이었다. 12월에 출발한 여행은 9일 동안 바르셀로나를 시작으로 그라나다, 네르하, 론다, 세비야를 거쳐 톨레도를 마지막 목적지로 하는 루트였다. '스페인 여행' 하면 빠질 수 없는 도시인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여행의 가장 큰 요소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 까사 바트요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많은 색채를 지닌 집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까사 바트요는 뼈의 집, 용의집, 바닷속 집 등 다양한 별명이 있는데 건물의 내외부를 보면 볼수록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외관은 뼈로 이뤄진 듯하다가도 내부로 들어가면 마치 채광과 함께 일렁이는 바닷속을 헤엄치며 올라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도달한 옥상에서는 용의비늘이 떠오른다.
가우디 일생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은 1882년 착공해 1926년 사망 때까지 40여 년간 총괄하여 작업한 건축물로, 2026년 완공 예정이나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은 반반인 듯하다. 성당은 탄생의 문, 수난의 문, 영광의문 3개로 이뤄져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파란빛과 주황빛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아름다운 창이 성당 내부를 빛내고 있다. 해의 방향에 따라 오전에는 새벽의 이슬처럼 푸른빛이 성당을 서서히 밝히고, 오후에는 정열적인 주황빛이 성당 내부를 따뜻하고 환하게 밝혀준다. 이외에도 구엘공원, 까사밀라 등 다양한 건축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바르셀로나를 보려면 최소 4일 이상은 머물러야 하는 도시다. 다시 간다면 바르셀로나에서만 일주일을 머물고 싶을 정도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풍성한 타파스 만찬
그라나다에서는 알함브라 궁전을 방문하고 타파스 투어를 했다. 이베리아 반도 마지막 이슬람 왕조의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 여행의 필수 코스다. 이슬람 문화를 궁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건축물 벽, 기둥, 천장 등 모든 곳에서 다양하고 정교한 패턴을 감상할 수 있다. 궁전 내부만으로도 아름다운데, 높은 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외부를 바라보면 알바이신 지구, 그라나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2시간 정도 천천히 내부를 거닐고 있으면 이사벨 여왕의 기분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여름 별장인 '헤네랄리페'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크고 길게 이어진 조경수를 통과하면 꽃과 모자이크 바닥, 줄지어진 분수로 가득한 긴 여름정원이다. 타파스는 스페인에서 식사 전 술과 함께 곁들여먹는 소량의 음식을 일컫는데, 그라나다는 특히 물가가 싸고 타파스를 제공하는 좋은 술집이 많아 타파스 투어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다양한 맛의 타파스를 즐기기에는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 이득이기에 동행을 구해 저녁식사를 함께 즐겼다. 좋은 사람들과 테이블을 한가득 채운타파스들, 그리고 샹그리아와 띤또를 들며 외치는 "살룻!"(건배!).
아름다운 시간을 선사한 론다와 안달루시아, 톨레도
론다는 과거 여행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며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지게된 도시다. 누에보다리의 웅장한 모습과 가파른 절벽 위에 지어진 하얀 집들이 한 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탁 트인 시야와 함께 까마득한 깊이의 협곡 밑바닥까지 이어진 거대한 다리는 세계 사진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다.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탁 트인 협곡 절경이 겨울이 되면 조금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해 겨울보다는 여름에 가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지방을 대표하는 도시로 스페인 광장, 세비야 대성당, 플라멩코 공연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다. 스페인 광장은 개인적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 아닐까 싶다. 내가 방문했던 날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아쉬웠지만 맑은 날이라면 단연 최고로 꼽는 장소일 듯하다. 세비야 대성당은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과 영국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실제로 내부를 관람하면 성당의 경건함에 숨을 죽이게 될 정도다.
스페인 왕실에 실망한 콜럼버스가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고 유언을 남겨 공중에 떠 있는 콜럼버스 무덤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세비야에서는 다양한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다. 길을 지나다가도 오후 4시쯤 되면 거리에서 공연 홍보 전단지를 나눠준다. 한 극장에 들어가 공연을 보았는데,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공연이기에 더욱 뜻깊었다. 톨레도는 마드리드 인근의 소도시로 중세시대의 요새를 닮았다. 배우지성과 이보영의 신혼여행 촬영지기도 했으며,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집]에도 등장한 곳이다.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 당일치기나 1박정도 머무르면 충분한 도시다. 톨레도의 하이라이트는 전망대에 올라가 카페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 그리고 발코니로 들어서서 중세시대의 거대한 요새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전경이다. 맑은 하늘 아래톨레도의 전경, 그 거대한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타호강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이 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야경 또한 너무 황홀해서 열심히 구경하느라 잠을 설칠 정도였다.
일상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의도치 않은 경험들
"지나간 삶을 추억하는 것은 그 삶을 다시 한 번 사는 것과 같다"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뒤 혼자 가는 여행의 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택하고 즐겼던 이 여행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것 같다. 로마의 시인 마르쿠스 마르티알리스의 말처럼,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양분이 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또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철저히 이방인의 자세로 임했던 여행이 역설적으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들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라고들 하는데, 찰나의 순간만큼은 내 의지대로 흘러가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와 결국 더 큰 추억으로 남는 것은 계획에 없던 뜻밖의 경험들이다. 그런 예상 밖의 경험을 통해,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는, 내가 속한 일상의 가치를 더 크게 깨닫곤 한다.
※ 다음호 필봉계주 주자는 강원지역본부 안전환경부 김여름 주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