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COLUMN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
태평양전쟁
에너지 이용의 역사 ②

writer과학칼럼니스트
이독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하와이 오아후 북쪽 해상의 일본 항공모함 6척에서 군용항공기 183대가 진주만을 향해 발진했다. 미국은 당일의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일본 군용기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완벽한 기습 성공이었다. 1차 183대, 2차 167대의 항공기 공격에 의해 미국은 전투함 16척의 피해를 보았고 수천 명의 인명피해가 따랐다. 이에 반해 일본의 피해는 미미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Wikipedia
2차 공격이 끝나고 일부 조종사들은 함대 지휘관 나구모 중장에게 3차 공격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박을 수리할 수 있는 드라이 도크와 유류저장시설이 피해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류저장시설이 파괴되면 미 태평양 함대는 기동 불가로 당분간 발이 묶일 터였다. 그러나 2차 공격부터는 정신을 차린 미 해군의 반격에 일본 항공기들의 손실이 증가하고 있었고 3차 공격에서의 전력 보존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주변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미 항공모함도 신경 쓰였고, 3차 공격대가 야간에 착함하게 되면 있을 손실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구모는 함대를 돌렸다. 아군 손실을 최소화한 전술적 성공에 만족했다. 바로 이 부분이 후대의 역사가와 군사전문가들에게 질문거리를 던진다. 만약 3차 공격을 감행했다면? 미 태평양 함대의 수리창과 유류저장고를 파괴했다면 태평양전쟁의 향방은 달라졌을까?
사가들은 만약 유류저장고가 파괴되었다면 미 해군의 반격은 1년 이상 지연되었을 것으로 예상했고,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은 전쟁이 2년 더 연장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석유는 함대의, 그리고 제해권과 군사력의 핵심 자원이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일본이 태평양전쟁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주만을 공습한 순간,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남방 작전을 시작한 순간, 좀 더 시간을 돌려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고 중일전쟁을 시작한 순간 일본의 패망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체 일본은 왜 진주만을 공격했을까?
일본 내에서도 미국을 온전히 제압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과거 일본이 치른 전쟁의 교훈을 보니 일단 함대 결전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 서구 열강은 꼬리를 내리고 일본과 평화 협상을 할 터였다. 일본은 돌이킬 수 없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열강은 일본의 팽창주의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고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 제재를 풀기 위해서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멈춰야 했다. 일본 입장에서 중일전쟁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전쟁이었고, 사실상 다 이긴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이 버티는 이유는 오직 미국의 지원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물러나면 자원이 부족한 일본의 약점은 여실히 드러나게 되고 앞으로도 미국에 휘둘릴 터였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이 추진한 군국주의 노선은 무위로 돌아가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도 아무 의미가 없어질 판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전쟁으로 경제를 지탱하는 나라였다. 여기서 물러선다는 것은 50년을 후퇴하는 것이며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에서 아시아의 소국으로 전락하고 경제는 파탄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은 물러설 수 없었고, 이는 미국도 알고 있었다. 두 나라는 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미국이 일본에 시행한 금수조치는 무엇이었을까? 전략자원, 특히 석유와 철강의 공급을 끊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이미 석유의 중요성은 검증이 끝났다. 석유 보일러를 사용하는 전투함과 석탄 보일러를 사용하는 전투함은 속도부터 대폭 차이가 났다. 석유를 사용하면 연료의 부피도, 출력도, 운용 인원도, 무게도 모든 면에서 유리했다. 남는 인원과 무게는 화력에 집중할 수 있었다. 거함거포주의 시대에 석탄을 연료로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된 석탄과 달리 석유는 자원 분포가 심하게 편중되어 있었다. 일본에도 소규모 유전이 있었지만, 생산량은 보잘것없었다. 당시에는 중동에 유전이 개발되기 전이었고, 세계 최대의 유전은 미국의 텍사스 유전과 코카서스 지방의 바쿠 유전이었다. (독소전쟁의 원인 중 하나인 바쿠 유전 맞다. 나치 독일도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바쿠 유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은 석유의 90%를 수입에 의존했고, 80%를 미국에서 수입했다. 석유가 없으면 경제는 멈출 것이 확실했다.
석유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들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석탄에 수소를 첨가하여 석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효율은 대단히 낮지만, 역으로 그렇게라도 해서 석유를 생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자원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본 특유의 낮은 공업 수준으로 인해 결국 포기하게 된다. 정어리를 이용하는 방안도 후보에 올랐다. 당시 엄청난 어획량을 보이던 정어리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내 난방유는 물론 선박 연료로도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 모를 엄청난 어획고를 보이던 정어리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어리기름으로는 연료의 자립은커녕 석유의 대체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당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에는 석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본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석유 탐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석유 탐사 기술도, 시추 기술도, 심지어 운까지도 부족했다. 30년 가까이 만주에서 유전을 찾던 일본은 결국 포기하고 만다. 이제 일본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여 중일전쟁을 멈추고 점령지의 이권을 포기하고 종국엔 군국주의를 포기하거나, 다른 곳에서 석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협상 테이블 위에 조선의 독립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만주국만 있을 따름이었다.)
일본은 석유를 확보하기로 했다. 남방작전을 통해 동남아를 동시 침공해 각종 자원을 확보하면서 무엇보다 인도네시아의 유전을 차지하고자 했다. 마침 당시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았던 연합국들은 유럽 내 전쟁으로 인해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필 인도네시아의 유전과 일본 본토 사이에는 미국령 필리핀이 버티고 있었다. 결국 일본 입장에서 거리낄 것은 단 하나, 미국의 태평양 함대였다. 태평양 함대의 기지였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서 궤멸시키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그렇게 일본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전쟁은 처음부터 석유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석유 자원의 중요도는 그 어떤 자원과도 비교할 수 없이 높다. 특히 열강 중 하나가 되고자 군국주의 노선을 택하고 전쟁 특수로 경제를 팽창시키던 일본은 대공황의 타개책으로 만주국을 세웠고 이어 중일전쟁까지 일으키며 팽창 야욕을 드러냈다. 열강들이 즐비하던 당시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석유 자원은 필수였고, 안정적인 석유 공급망이 없던 일본의 약점은 바로 석유였다. 일본에 석유를 공급하는 미국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석유를 사용했다. 경제가 붕괴할 위기에 절박해진 일본은 석유 자원의 확보를 위해 인도네시아를 침공했고, 인도네시아 유전에서 공급되는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미 태평양 함대를 공격한 것이다. 처음부터 국가 총력전으로 가면 미국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도 미국과 전쟁에 돌입한 일본의 모습에서, 또한 진주만 공습 당시 유류저장고가 무사한 덕에 미국의 반격이 빠를 수 있었다고 분석하는 니미츠 제독의 말에서 석유 자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일본이 그렇게 찾다 포기한 만주의 다칭 유전은 1959년 9월에 발견되어 중국에 석유를 공급한다. 어떤 역사학자는 만약 일본이 만주에서 다칭 유전을 발견하여 석유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태평양전쟁은 물론 중일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식민지 조선을 향한 수탈과 강제 동원의 이유가, 또한 사지로 몰아넣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와 땀과 희생의 이유가 석유 자원의 확보라는 점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최근 천연가스를 무기화하는 러시아를 바라보며 정말 역사는 반복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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