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GAS ESSAY
코로나19 자가격리
14일간의 일기
[글 계약운영부 유지은 대리]
“나 확진이래!! 너도 빨리 검사받으러 가봐!”
2021년 7월 12일 월요일, 오랜만에 있는 점심 약속을 나가기 위해 준비하던 찰나 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평일 업무시간 중 가족의 전화는 으레 불안하기 마련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은 내게 언니는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나 확진이래!! 너도 빨리 검사받으러 가봐!”
사건은 바로 전날인 일요일, 소파에 누워있던 언니가 “헐”하는 외마디 외침과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했다. 언니 회사가 있는 빌딩 타 회사 직원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고, 같은 건물 직원 모두에게 검사를 권고하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언니는 가벼운 마음으로 슬리퍼를 신고 검사 받으러 나갔고 나는 그런 언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음날 위와 같은 연락을 받은 것이다.
언니에 대한 걱정을 할 틈도 없이 나는 밀접접촉자로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해야 했다. 부장님께 말씀을 드리고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보건소로 향했다. 대구시 홈페이지에는 구별로 코로나 선별진료소에 대한 위치와 전화번호가 나와 있지만 그 번호는 100통을 걸어도 100번을 받지 않아 무작정 가장 가까운 보건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담당자는 이제 점심시간이니 검사는 중지되며, 전화로 예약을 하고 오라는 말만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은 12시였고 내가 서있는 곳은 대구 아스팔트 위였다. 38도가 넘는 날씨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소중한 직장인의 점심시간이기에 군말 없이 차에서 대기를 하다가 1시에 다시 보건소로 향했다.
보건소에는 분노한 시민들이 작은 봉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전화를 하고 오라캤으면 전화를 받아야재 전화도 안 받으면서 전화하고 오라카면 우야란 말인교!!!” 정말 속 시원했다. 결국 다른 담당자가 나와 예약을 못하고 온 사람들은 전화번호를 적고 가면 따로 연락을 줄 테니 그때 검사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대기를 하며 (서울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해보니 부모님은 보건소에 줄이 길어 인근 병원에서 6천 원을 내고 검사를 받으셨다고 했다. 보건소가 아니라도 코로나 검사를 하는 곳이 있구나!! 혹시나 하는 기대로 주위 병원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내 근처에는 그 어느 곳도 코로나 검사를 하는 일반 병원은 없었다. 의료강국 코리아는 서울의 코리아임을 뼈아프게 느꼈다. 그렇게 기나긴 기다림 끝에 코로나 검사를 받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참고로 코 찌르는 건 정말 아팠다. 수영하다가 물 잘못 먹은 느낌 그대로 뾰족하게 찌른다고 생각하면 쉽다).
재난총괄부 직원이 내내 전화하며 상황을 체크하는데 문득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언니분이 검사받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왜 대구로 내려오신 걸까요?” 나는 “출근해야 해서 내려왔다”고 대답하다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언니도 부모님도 나도 당연하게 언니가 확진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고, 대중교통인 기차를 타고 직원들이 있는 회사로 출근까지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음성이었지만 양성이었다면 이 역시도 엄청난 민폐인 일이었다. 매일 마스크를 쓰고 QR코드 체크인을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코로나 확진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난 정말 아무 곳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14일간의 자가격리가 시작되었다. 자가격리 어플을 깔고 오전·오후마다 체온과 이상증세 여부를 전송했으며 격리 3일차 보건소에서 나눠주는 구호물품과 격리통지서를 수령했다. 공가를 올렸지만 기한이 있는 일들이 있기에 VPN으로 접속하며 종종 업무를 이어나갔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은 답답하지 않냐,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정말 나가지 않았느냐, 이 세 가지였다.
우선 크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이건 사람 성향마다 나뉠 것 같은데 나는 원래도 집에서 잘 지냈으며 일도 하고 회사 사람들과 업무 관련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시간은 의외로 금방 지나갔다. 또한 해당 시기 대구가 무척, 아주 무척 더웠는데 그래서 어차피 나가도 더울 거 집에 있는 게 낫다고 마음먹은 것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근데 솔직히 주말에는 조금 심난했었다.
식사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현대사회는 진정 배달의 시대였다. 배○의 ○○, 쿠○, s○○마켓만 있다면 한 달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쓰레기였다. 배달을 시킬 때마다 엄청난 양의 재활용 용기가 쏟아졌는데 현관에 쌓여져 가는 쓰레기 때문에 새로운 배달을 받으러 갈 때마다 불편했다.
그리고 난 정말 아무 곳도 나가지 않았다. 격리자 개개인에 대한 감찰은 불가능하기에 몰래 외출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지만 날씨도 덥고 괜히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아 집에만 있었다. 이건 나중에 안 사실인데 자가격리 어플이 위치정보를 공유하게 되어있고, 자택에서 멀리 떨어지면 알람이 간다고 한다(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가장 공유하고 싶은 것은 언니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언니는 확진되었지만 격리장소 여유가 없어 이틀 동안 자택에서 격리하다가 아산에 있는 격리소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아무 증상이 없다가 이틀 차에는 미각이 사라졌고, 격리소 이동 후(확진 3일차)에 아프기 시작했는데 흉통과 근육통, 두통이 주된 증상이었다. 자는 내내 장기를 쥐어짜는 근육통이 느껴졌으며 일어나도 두통 때문에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해 내내 누워있었다고 한다. 밥도 너무 너무 너무 맛이 없어 식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격리소는 격리만 할 뿐 기본적으로는 자가치유를 하는 곳이므로 어떠한 치료나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으며 요청 시 약을 받을 수는 있지만 요청자가 너무 많아 밤늦게나 다음날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끔 증상이 심해지는 사람들은 병원으로 이송되는데 언니와 같은 방을 썼던 아주머니가 통증으로 이송을 요청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안 된다며 거부당했다고 한다. 퇴소 전날 언니가 너무 아파 약을 요청하자 의사가 지금 약을 받아 가면 다음날 퇴소하지 못한다고 했고 정말 나오고 싶었던 언니는 그날 새벽 끙끙 앓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한다. 긴긴밤이었다.
언니는 지금은 퇴소했고 밥도 잘 먹고 평소에는 잘 지내지만 아침마다 흉통이 있으며 일하다가도, 걷다가도 문득 아주 불안한 감정이 든다고 한다. 단순한 우려 정도가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쉬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다. 다행히 심리치료를 받으며 나아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코로나는 어디에나 있고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확진된다면 생각보다 그 고통이 크다는 점을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다음호 KOGAS ESSAY의 주인공은 공급운영부 권용찬 대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