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愛온도
올해 나이 서른셋, 어릴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고 지금도 즐기는 '게임 덕후'. 대구MBC교향악단 전임지휘자로 활동중이며 동시에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아르티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주목할 만한 예술가. 이 두 문장은 각기 다른 인물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흥미롭게도 게임음악 오케스트라 전문 플랫폼, 주식회사 플래직을 이끌고 있는 진솔 대표의 프로필로 수렴된다. 이 흥미로운 이력만으로도 게임을 사랑하는 지휘자 진솔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글 김승희 사진 김지원]
지휘자 진솔은
대한민국의 지휘자이자 기업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독일 만하임국립음악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르티제 예술감독과 상임지휘자로 활동 중이며, 말러리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대구MBC교향악단 전임지휘자,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상임지휘자, 서울학생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7년 설립한 게임 음악 플랫폼 (주)플래직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 Q
- 게임 음악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 없는 길을 개척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게임 음악을 클래식 무대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셨어요?
- A
- 저는 어려서부터 게임을 많이 좋아했고, 또 지금도 즐깁니다. 우리나라 게임 산업의 부흥기로 꼽히는 1990년대 후반, 당시 청소년이던 저는 학교생활의 스트레스나 상처를 게임을 통해 위로 받으며 성장했어요. 클래식 업계는 워낙 보수적이어서 실용음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지만 시대가 바뀌고 게임과 함께 자라온 저같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하나 둘 클래식 업계 종사자가 되면서 이 업계도 자연스럽게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제 아이디어가 기발했다기보다, 다들 하고는 싶은데 업계 분위기 상 시도할 엄두를 못 냈던 걸 저는 용기내서 실행한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 Q
- '게임 덕후'라고 들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게임과 그이유를 소개해주시자면?
- A
- 요즘은 바빠서 스마트폰 게임을 주로 하는데, 유행이 좀 지나긴 했지만 '포켓몬 고'를 즐겨요. 서울학생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아이들과 만날 기회가 많다보니 단원들과의 교감을 위해 '브롤스타즈'도 시작했어요. 이게임은 자녀를 둔 부모님들 사이에서는 유명한데요. 게임 자체는 단순하지만 친구들을 초대해서 대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통 창구 역할을 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싶어 하고, 대부분의 게임은 이러한 본능을 충족시켜줘요. 또 전개가 빨라 요즘 친구들 성향과도 잘 맞는 것 같아요.
- Q
- 학창시절 게임에 빠져들게 된 동기가 친구들의 괴롭힘때문이었다고요.
- A
- 몇몇 친구들과의 문제이긴 했지만, 당시 저에게 교실 내 괴롭힘은 현실 사회에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어요. 집안도 엄격해서 가족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말수도 줄고 현실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경험치가 줄어들었죠. 반면, 게임 속 세상에서는 노력한 만큼 보상도 주어지고 나름 평등하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현실보다는 훨씬 간접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사이버 세계에서나마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되고, 나름 성취감도 느끼게 되니 힘든 현실이 잠시간 극복되더라고요. 게임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Q
- 게임 음악 오케스트라도 생소하지만 '젊은' '여성' 지휘자도 낯선 단어인데, 그만큼 지휘자가 되기까지 힘들 때도 많았을 것 같아요.
- A
- 힘들었다기보다, 솔직히 지휘 공부를 할 당시에는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거란 상상 조차 못했어요. 어리고 여자라서 받는 차별이야 당연한 거니까 그냥 받아들어야 하는 현실쯤으로 생각했죠. 그럼에도 해보고 싶다는 작은 꿈은 있었지만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고, 자연스러운 때에 잘 풀린 것 같아요.
- Q
- 세이지 오자와의 지휘를 보고 지휘자의 꿈을 꾸셨다고 들었어요. 당시 어떤 점에 매료된 건가요?
- A
- 우리는 어떤 연주회를 가더라도 늘 지휘자의 뒷모습만 보잖아요. 그래서 굳이 지휘자에 집중하기보다 얼굴이 마주 보이는 연주자들에게 눈길이 가죠. 어느 날 우연히 한 영상을 봤는데, 세이지 오자와의 지휘하는 앞모습을 찍은 거였어요. 작은 체구의 백발노인이었지만 단원 한 명 한 명과 엄청난 교감을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어요. '지휘자란 단원들과의 교감을 객석으로 던져 전달하는 역할'이라고, 제가 생각했던 지휘자의 역할을 다시 정의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배워보고 싶어졌죠.
- Q
- 부모님 몰래 대학 입시를 준비했을 만큼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자랑스러워하시죠?
- A
- 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부모님 모두 음악을 전공하셔서 지휘자가 될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재차 설득하셨고, 하물며 여자 지휘자는 기회조차 없을 거라고 완강히 반대하셨어요. 저도 당시에는 거창한 꿈보다 지휘 공부가 너무 해보고 싶어서 도전한 거였어요. 눈앞의 작은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실현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셈이죠.
- Q
- 연주회를 목적으로 공연장을 찾는 클래식 관객과 달리 게임 음악 연주회를 방문하는 관객들은 게임에 대한 애정으로 오는 분들이라 공연장 분위기도 많이 다를 것 같아요.
- A
- 일반 연주회장에 오시는 분들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분 중에서도 애호가분들이 주로 오세요. 그래서 그 유입이 굉장히 자연스러운데, 게임음악 오케스트라를 열면 난생처음 공연장에 오시는 분들도 계셔서 저희는 상상조차 못한 문의를 받기도 해요. 박수를 언제 쳐야 하는지 어떤 복장으로 가야 하는지 하나하나 지도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되죠. 일반 연주회 관객 분들은 공연 30분 전에 오시는데, 게임음악 오케스트라가 열릴 땐 2~3시간 전은 기본이고 연주회를 위해 아예 하루 일과를 빼서 오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그만큼 게임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즐겨주시니 진행하면서 많이 배우게 돼요.
- Q
- 게임 음악 연주회가 클래식 대중화에도 큰 도움이 되겠네요.
- A
-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분들 자체가 많지 않은데, 저희 연주회는 대중에게 그동안 몰랐던 클래식 음악을 접해보는 장이 아닐까 싶어요. 클래식은 악기 종류도 다양하고 사전에 알아야 할 정보가 많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은 편인데, 게임 음악 연주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클래식으로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Q
- 아르티제 예술감독으로도 활동하고 계시죠. 프로젝트 중 말러 교향곡 연주를 위해 구성된 '말러리안'을 이끌고 계신데요. 말러 교향곡이 전문 연주가들도 연주하기 까다로운 곡들이 대부분이라고 들었는데, 기획의도가 어떻게 되나요?
- A
- 지금까지 네 번의 공연을 펼쳤는데, 말러리안 2까지는 '벽을 허물자'였어요. 아마추어와 전문가 사이의 벽을 허물고 싶었는데, 아마추어라는 단어로 인해 저 스스로도 연주의 전체적인 수준에 대한 관용이 너무 커지게 되더라고요. 아마추어 연주자들은 다른 본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습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취지가 좋다고 해서 음악적인 성취도를 적절히 타협하며 우리끼리만 만족하는 공연을 계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러리안 3부터는 누구나 오디션을 볼 수는 있지만 실력과 준비가 된 분들만 함께하는 것으로 그 취지가 조금 바뀌었어요. 말러 교향곡은 오케스트라 자체가 워낙 커서 예산이 많이 드는 공연이에요. 그래서 국내에서 자주 선보일 수 있는 공연이 아니다 보니 참여하고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죠. 그만큼 도전적인 공연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올해는 7월 24일에 공연이 예정돼 있어요.
- Q
- 지금의 '지휘자 진솔'을 만든 건 '덕후 기질'이 아닐까 싶은데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덕후'들이 세상을 이끌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미래의 인재상인 덕후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시자면?
- A
- 덕후가 그렇게 트렌드인가요?(웃음) 음, 대표적인 덕후 기질은 집착이 아닐까 싶어요. 근데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 기질이 심하면 사회성이 좀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1시간만 공부하자고 친구들과 약속했다고 치면, 덕후는 30분만 더 하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약속을 깰 수도 있어요. 자신의 집착과 생각을 내려놓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다는 고민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때 내 신념을 믿고 가져가느냐 중도 하차하느냐에 따라 덕후로서의 성패가 갈릴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는 좋지 않은 기질일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조건임에는 분명한 것 같아요.
- Q
- 대중에게 어떤 지휘자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 A
- 저는 '어떤 지휘자'보다는 그냥 '진솔'로 기억되고 싶어요. 직업의 틀 안에 나를 가두기보다 나란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하는데요. 제가 한 말을 모두 지키고 올바른 길을 잘 개척해나가는, 즉 '제가 하고 싶은 걸 잘 실천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지휘자 진솔 님의 추천작
만화 [세일러문]
- 감독 : 콘 치아키
'간혹'이긴 했지만 여성이 주인공이 돼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들이 몇 개 있었다. 그중 진솔 지휘자가 추천하는 작품은 <세일러문>. 성인이 되어 생각해보니 '여성이 전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세계관이 마음에 들었다고 덧붙인다.
음악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 작곡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건반 악기용 독주곡 모음집. 음악인들에게는 '음악의 구약'으로 평가받는 곡집으로, 진솔 지휘자는 특히 '학구적인 태도로 음악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곡' 즉, 초심으로 되돌리는 음악이라 소개한다.
도서 [비폭력대화]
- 저자 : 마셜 B. 로젠버그
- 출판사 : 한국NVC센터
비폭력대화(NVC)의 기본 개념과 모델, 모델 적용 과정 등을 자세히 다루는 기본서로 소통에 도움이 되는 실용서. 진솔 지휘자는 이 책을 통해 더 좋은 대화법을 배울 수 있다고 소개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상대방에게 지혜롭게 전달하는 방법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