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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봉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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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봉계주

"시베리아 기차여행 갈래?" "그래, 가자."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도 여행에 포함된다고 했던가. 지난해 1월, 별 고민 없이 한 대답으로 5월에 떠나기로 한 열흘간의 러시아여행은 시작됐다. 나에게 러시아는 모스크바만 떠오를 정도로 관심이 크지 않던 나라였지만, 여행사에서 일하는 친구 덕에 일정은 일사천리로 정해졌다. 친구는 부산에서, 나는 인천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뒤 열차로 3일간 이동해 이르쿠츠크를 들렀다가 비행기로 모스크바, 야간열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여행지를 조사하고 숙소, 교통편 예약은 여느 여행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인터넷도 안 되는 기차에서 3일 내내 어떻게 지낼지가 관건이었다. 끼니는 전투식량으로, 씻는것은 불편하다고 하니 씻지 않기로 하고, 읽을 책과 전통적인 보드게임이라며 화투를 챙기는 것으로 우리의 여행 준비는 끝났다.

[글 인천기지본부 공정기술부 서자영 직원]



환상은 없다

요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TV 프로그램, 또 러시아 군인들이 나와서 화제가 된 여행 영상들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해 많은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내 여행의 시작도 친구가 가진 환상 덕분이었지만, 나는 여행 영상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친구가 보내주는 사진 몇 장과 씻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는 여행후기들, 인터넷을 찾아봐도 비슷비슷한 자료들이 배경지식의 전부였다. 그 덕에 열차 안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겠다는 아주 작은 환상만 가지고 시작했다. 열차 안에서는 정말 먹고 자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먹고 자고 정차 시간이 긴 역을 기다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북한 사람도 없었다. 러시아 사람들과의 소통도 불가능했다. 시차가 몇 번이나 바뀐다는데 먹고 자기바빴다.

소위 꼬리 칸이라고 하는 삼등칸으로 기차여행을 한 건 낯선 사람들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건 "니하오"라고 인사하는 꼬맹이 하키 선수단과 금주인 열차에서 우리에게 자꾸 보드카를 권하는 술 취한 할아버지뿐이었다. 정말 영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열차에서 시간을 때우려 가져간 화투에 다들 관심을 갖긴 했다. 설명하려고 "Same picture"라고 말하며 화투짝을 치는데도 그 사람들 표정에는 물음표만 있었다. 결국 우리는 포기하고 둘이서 열심히 맞고만 쳤다. "왜 우리가 탔을 때는 친구가 될 만한 젊은 사람들이 타지 않았을까, 술 취한 할아버지가 전부였을까, 할아버지 술주정 받아주기에 힘들었다"며 지금도 얘기한다. 잔뜩 챙긴 음식도 동이 났다. 식사 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먹는 음식 냄새에 우리도 열심히 먹은 덕에 여유롭다고 생각하며 챙긴 음식이 그렇게 금방 없어질 줄은 우리 둘 다 몰랐다. 전투식량과 컵라면, 레토르트 음식이 지겹다고 생각하지 말고 챙겨간 것을 아껴 먹어야 했는데…. 열차에서 파는 음식은 비싸고 맛이 없다. 열차에서 사 먹을 생각보다 많이 챙겨가서 적당히 먹어야 했다.

열차에서 위생을 지키기란 어렵다. 출발할 때 깨끗했던 화장실은 금세 냄새나고 더러워졌다. 샤워를 하려면 돈을 내야했고 꼬리 칸에서 샤워부스가 있는 일등칸까지 머나먼 길을 가야 했다. 머리를 제대로 말릴 수 없어서 감기에 걸리기도 쉬운 환경이었다. 나는 샤워를 한 이후로 여행 내내 감기에 걸린 채 지냈었다. 한 번 정도는 경험 삼아 샤워해볼 만하지만 굳이 열차 안에서 씻지 않아도 괜찮다. 모두가 안씻는다. 이렇게 나의 환상은 깨졌다. 불편함은 괜찮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이랑 놀아보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실현하지 못한 채 친구와의 추억만 소복이 쌓았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고단했던 여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가고 싶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지금까지 시베리아 여행에 대한 안 좋았던 추억만이야기했는데 이제 좋았던 것들도 적어보려고 한다. 열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그 풍경이 시시각각 변한다. 자작나무숲이었다가 덤불이었다가 강가였다가 설경까지. 그러다 간혹 보이는 마을에는 인터넷이 연결될까 기대해 보기도 한다. 울란우데에 가까워질 때쯤, 두세 시간만 창밖을 보면 온갖 풍경을 다 볼 수 있다. 인터넷도 안 되고 소통도 안 되는 덕분에 창밖 풍경에 집중할 수 있다. 친구와 수다를 떨고, 책을 읽고, 화투도 치고, 열차 구경을 해도 시간이 남는다. 사색 아닌 사색을 하며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횡단 열차를 다시 탄다면 꼭 다시 갈 곳이 있다. 이르쿠츠크 옆에 있는 바이칼 호수이다. 세계 최대의 호수라고 하는데, 저 멀리 설산과 호수가 절경이었다. 바이칼 호수는 너무 커서 표지판에는 'beach'라고 적혀있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담기지 않아서 다시 한번 내 눈으로 담고 싶다. 또 바이칼 호수에 발을 담그면 5년 젊어진다고 하니까 다시 가볼 만하지!

러시아를 가로지르면서 네 도시를 지났는데, 서쪽으로 갈수록 점점 유럽 느낌이 났다. 블라디보스토크만 해도 항구도시라는 느낌뿐이었다. 모스크바로 가니 현대적인 도시라는 느낌이 좀 더 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 같았다. 그 중간의 이르쿠추크는 시베리아의 프랑스라고 불리는 도시이다. 한 나라 안에서 이렇게 도시마다 다른 느낌을 한번에 받을 수 있었던 건 횡단 열차로 여행을 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횡단 열차가 여행의 주목적이어서 짧은 시간에 여러 도시를 지나는 일정을 만들 수 있다. 단점들에 비해 좋은 점은 많이 기억나지 않는다. 여행과 추억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가고 싶은, 꼭 다시 가야할 여행이었다.

다음 필봉계주 주자는 인천기지본부 계전보전부 서하은 직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