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은정 사진. 김범기(세종), 박재우(구미)
오래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내는 그것처럼 우리네 우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깊고 짙어진다. 15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지만 웃음꽃이 떠나질 않았던, 네 사람의 세월이 무색했던 만남 속으로 가본다.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 – 뒤웅박고을 - 이응다리
“언니는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대?”
“정말? 그러는 너도 예전 그대로야.”
“여전히 예쁘다는 거지?”
“그건 알아서 생각하고. 하하.”
만나자마자 쉴 새 없이 수다가 쏟아지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설렘과 반가움이 넘치면서도 마치 며칠 전 만난 친구를 오늘 또 만난 듯했다. 놀라운 건 이번 여행 멤버인 대전충청지역본부 서기순 자문위원과 윤성희 과장, 이상우 대리, 그리고 당진기지안전건설단 이리라 과장이 15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이다. 1996년 대전충청지역본부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이들은 5년 정도 함께 근무하다가 각자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다. 가끔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을 뿐, 얼굴을 마주할 새도 없이 바쁘게 살다가 15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여행하게 됐다.
“서기순 자문위원이 내년에 퇴임해요. 현재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고요. 젊은 날을 함께한 소중한 인연으로서 언니의 모습을 남기고 함께한 추억을 만들고 싶어 여행을 추진하게 됐습니다.” 이번 여행을 제안한 막내 윤성희 과장의 말에 모두 눈가가 촉촉해졌다. 여행지를 세종으로 선택한 것도, 처음 인연을 맺은 대전과 가깝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둘러본 곳이 없기 때문이다.
서 자문위원과 윤 과장, 이 대리는 오전에 먼저 만나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에 다녀왔다. 정부세종청사 건물 15동을 다리로 연결해 조성한 정원으로 총길이 3.6km, 축구장 11개를 합친 7만 9,194㎡의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옥상정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곳이다. 계절마다 식수를 자주 교체해 어느 때 가더라도 하늘로 열린 숲길을 걷는 듯이 힐링하는 명소로 꼽힌다. 이 대리는 “정원을 걷는 내내 그동안 밀린 수다를 떠느라 바빴어요.”라면서 반가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15년 만에 만났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신기해요. 입사해 첫정을 맺은 동료들이라서 그런가 봐요. 어리바리한 신입 시절부터 직급이 높아지고 성장하는 과정까지 함께한 사이라 더 끈끈한 거 같아요.”
두 번째 여행지는 전통 장류 테마공원인 뒤웅박고을. 햇볕 잘 드는 산자락에 1,000여 개의 장독이 줄지어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지는 곳으로, 운치 있는 소나무 사이에 우뚝 솟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과 십이지신 조각상 같은 볼거리에 시를 담은 비석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당진기지안전건설단 이리라 과장까지 합세하면서 여행 멤버는 완전체가 됐다. 이리라 과장은 휴가를 내고 기꺼이 달려왔다며 들떠있었다. “성희 과장님 전화를 받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망설임 없이 달려가겠다고 했죠. 저는 멀리 떨어져 있어 정말 20년 만에 얼굴을 보는 거 같아요. 그런데, 모두 하나도 안 변했어, 정말!”
업무가 다르고 직급이 다르고 나이도 천차만별인 이들. 심지어 띠동갑만큼 나이 차가 있기도 한데, 이처럼 끈끈한 관계를 이어올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이상우 대리는 입사 때부터 티격태격하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됐고 그만큼 정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넷만 어울린 건 아니고 여자 직원 모두 정말 친하게 지냈어요. 여성이 많지 않을 때니까 여성이라는 동질감 하나로 다 같이 어울려 잘 지냈던 거 같아요. 점심시간마다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고 저녁엔 회식도 자주 했어요.” 윤성희 과장은 단 한 번도 나이 차를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동료로, 삶의 동반자로 인연을 이어왔다고 강조했다.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따스한 햇볕 아래, 제 안에 든 장을 맛있게 익히고 있을 장독들을 바라보며 서기순 자문위원은 정년을 앞두고 여행으로 한데 뭉친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할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 대학원까지 마치고 지금은 세무 분야에서 후배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도 올랐죠. 내 청춘을 다 바쳤고 최선을 다해 달려왔던 삶이라 후회도 없어요. 그리고 늘 함께 걸어준 동료들이 있어 행복했어요. 저는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윤성희 과장은 제2, 제3의 서기순이 나와야 한다고 힘주어서 말했다. “언니처럼 정년까지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선배들이 많아야 저희 같은 후배가 힘을 얻고 잘 따라갈 수 있는 거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 비슷한 또래가 하나둘 퇴사하거나 자리를 비우는 게 아쉽습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한동안 수다 삼매경이던 이들은 짧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세 번째 여행지인 이응다리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응다리는 금강을 품고 있는 듯한 원형 모양의 다리로, 국내에서 가장 긴 보행 전용 교량이다. 마지막 여행지로 향하면서도 이들의 수다는 끊이질 않았다. 오랜 세월만큼이나 묵힌 이야기도 많으리라. 그 이야기를 모두 풀어내기에 여행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
떠나가는 것들은 무슨 힘으로 잡을 수 있겠는가. 예정된 이별도, 떠나가는 계절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즐기고 헤쳐나갈 세 사람의 구미 여행기.
구미 금오랜드 – 금오산 케이블카 - 금리단길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부쩍 한가해진 구미 금오랜드.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온 가족 몇이 전부인 이곳에 KOGAS의 청년 셋이 등장했다. 주인공은 경영지원처 총무부 박희태 대리와 해외사업운영처 호주인니사업부 이종현 주임, 재무처 세무부 김세곤 주임. 이번 여행을 제안한 이종현 주임은 박희태 대리의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여행을 계획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박희태 대리님이 평소 가수 김현철의 ‘달의 몰락’을 즐겨 불러요. 노래에 ‘그녀가 좋아하던 저 달이~’라는 가사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왕이면 달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보자고 생각했죠. 그게 금오산이었습니다.”
금오산은 경북 구미와 칠곡군, 김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1970년 우리나라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금오랜드는 도립공원 내에 자리 잡은 작은 놀이공원. 규모는 작아도 바이킹, 회전목마, 관람차, 공중 자전거, 범퍼카 등 웬만한 놀이기구가 다 있다. “놀이공원에 왔으면 바이킹은 타야지.” 바이킹에 오르자마자 박 대리와 이 주임은 이미 신이 났고, 김 주임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바이킹이 작동하고 높이가 점차 높아지자,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부서도 다르고 업무도 달라 안면조차 없던 이들이 인연을 맺게 된 건 사내 축구동아리를 통해서였다. 팬데믹 탓에 함께 모여 운동하는 게 불가능했던 2021년 겨울, 운동을 좋아하던 이들이 회사 밖 풋살장으로 하나둘 모였고, 이후 사내 운동장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박 대리는 “풋살이나 축구를 할 때 쉬지 않고 달리다 보면 느껴지는 심장이 터질 듯한 느낌이 정말 좋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축구로 뭉친 이들이 이제는 매일 점심을 함께 먹고 저녁을 함께 보내며 심지어 주말까지 함께 만나는 사이가 됐다.
“나이 차가 딱 한 살씩입니다. 입사 시기가 겹치고 나잇대가 비슷하고 회사 숙소에서 지내다 보니 금세 친해졌어요. 무엇보다 생각도 비슷하고 성향도 비슷해요. 제가 어떤 일을 할라치면 어느새 형이 그 일을 먼저 하고 있다니까요.”
한적한 놀이공원을 뒤로하고 이들은 서둘러 케이블카를 타러 이동했다. 소백산맥의 지맥에 솟아있는 금오산은 산 전체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영남 8경 중 하나로 꼽히는데, 케이블카는 산 아래서부터 해운사가 있는 중턱까지 이어져 있어 금오산을 한눈에 조망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케이블카를 타본 적이 있다는 이종현 주임은 오랜만에 추억에 젖어 들었고, 태어나서 케이블카를 처음 타본다는 박희태 대리는 신기하다며 연신 싱글벙글했다. 겨울로 접어들었는데도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산은 여전히 알록달록 가을의 끝을 품고 있었다.
상부 승강장에 도착한 이들은 해운사를 지나 내친김에 대혜폭포, 도선굴까지 한달음에 올라갔다. 금오산의 해발고도 약 400m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대혜폭포는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폭포로도 불린다. 이날은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진 않아도 멋진 폭포 바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졌다. 자연 동굴인 도선굴은 해운사를 창건한 도선 대사가 참선해 득도한 장소로, 가는 길이 험하긴 해도 그 위에 서서 보는 풍경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어느새 어둑해지는 하늘과 산 전체 숲이 그야말로 그림 같다.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하니까 정말 기분이 상쾌합니다. 같은 얼굴들을 매번 회사나 숙소에서 보니까 지겹기도 했는데 이렇게 전혀 낯선 곳에서 만나니까 조금 새롭기도 하고요. 하하하.” 김세곤 주임은 그간 회사와 숙소만 오가던 루틴에서 벗어난 이번 여행이 힐링의 순간이라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이들은 마지막 여행지인 이른바 ‘금리단길’로 향했다. 금리단길은 구미역 후면광장에서 시작해 경북 외고까지 이어진 금오산로를 중심으로 다양한 가게와 감성적인 카페가 들어서서 문화와 감성이 넘치는 젊음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핫플이다. 이종현 주임은 추위를 단번에 날릴 수 있도록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 잔’ 하고 싶다고 밝혔다.
“저희끼리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진행하는 빅매치 경기를 보러 가자고요. 고향이 다르니까 주말이 되면 박희태 대리는 인천으로, 저는 춘천으로, 김세곤 주임은 창원으로 각자 흩어지거든요.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다 함께 축구 경기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종현 주임이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내년쯤에는 본사를 떠나 전국 어디로든 발령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령이 날지 혹은 더 연기될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매일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까지 삶 전체를 공유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다만 전국 각지로 흩어지더라도 ‘축구’라는 공통 주제로 언제까지든 인연을 이어갈 건 자명해 보였다. 무엇보다 어디에 있든지 결혼식에는 무조건 참석한다고 약속했단다. 가장 먼저 결혼하는 이에게 고급 가전제품을 선물한다는 약속과 함께.
“아직은 사회 초년생인데, 이렇게 좋은 동료이자 친구들을 만났다는 게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다른 곳에 발령이 나더라도 자주 만날 거 같아요. 지금처럼 매일 만나진 못해도 주말마다 축구 하러 모이지 않을까요?” 박희태 대리의 말에 공감하듯 모두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