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사업기획처 해외수소개발부 임갑석 직원
‘산티아고 순례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는 2012년 중순쯤이다. 그때 나는 군인이었다.
군대에서 진중문고로 제공되는 『Paper』라는 잡지에서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30일 넘게 걸으며 매일 다른 곳에서 자고, 매일 다른 것을 먹고, 매일 다른 풍경을 보고, 매일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하는 체험은 앞으로 남은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른 살 되기 전에 꼭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오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소나기를 피해 아무 처마 아래 들어가듯 첫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직장인이 되어 보니, 대한민국 직장인의 신분으로는 만 60세 이전에 30일 이상 순례길을 걷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두 가지 인생의 방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젊은 날의 순례길을 포기하고 60세 이후에 순례길을 가느냐. 아니면 지금 잘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순례길을 체험하고 오느냐.
약 1년 6개월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이라도 젊고 체력이 좋을 때 많은 경험을 하고 또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더 유익한 것 같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면 취업이야 어떻게든 다시 할 수 있지만, 60세 중·장년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다시 20대로 되돌아갈 순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평온하던 직장생활을 박차고 나와 스페인으로 향하게 되었다.
총 32일간 약 780km를 걸었다. 맑은 공기 마시고 좋은 풍경 보면서 다양한 것들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봤다. 조용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인생에 대해 그렇게 깊게, 넓게, 멀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삶을 살아가면서 좀 느긋하게, 좀 깊게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은 꼭 필요한 것 같다. ‘어떻게 살아왔고,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그렇게 살아온 것이 잘 살아온 길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더러운 걸레로 청소를 하면, 열심히 할수록 집은 더 더러워진다. 그렇기에 빨리 자신이 쥔 걸레가 깨끗한지, 더러운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성찰은 젊을 때, 특히 학생 때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으나 정작 학생 때는 영어, 수학 공부하고 취업 준비한다고 삶에 대해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늦은 나이가 되어 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그중 한 가지 사건만 소개하겠다. 바로 ‘이정표 한글 낙서’ 사건이다. 2019년 10월쯤 인터넷에 ‘산티아고 순례길 이정표에 누군가가 한글로 낙서를 했고 이것은 큰 공분을 사고 있다.’라는 식의 기사가 난 적이 있다. 나도 이 기사를 보고는 그 낙서를 한 사람을 매우 안 좋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직접 순례길을 걸으며 보니 이정표에는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낙서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 순례길에서는 낙서가 하나의 ‘문화’였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욕을 해대던 그 낙서한 한국인은 사실 욕먹을 만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이때 나는 엄청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가끔, 아주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정보만 가지고 어떤 일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린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몇 마디의 대화만 나눠 보고, 혹은 다른 사람의 평판만 두고 그에 대해 쉽게 판단해 버린다. 한 영화의 스틸컷만으로 그 영화 전체를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위한 정보를 모두 확보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장님들이 모여서 코끼리를 만지는 꼴 밖에는 안 되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의 내면 앞에서 모두 장님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말만 듣고 누군가에 대해 판단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타인의 이야기들은 그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나는 사람에 대한 판단을 최대한 보류한다. 이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사람에 대해 내가 가진 정보가 어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부분적인 정보들만 가지고 전체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순 없다. 바다의 한쪽 구석이 엄청 더럽게 오염되었다고 해서 이 바다 전체를 오염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가능성을 열어 두고 판단은 보류한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수박을 20년 동안 옆에 두고 겉껍질만 핥는다고 해서 그 수박의 진짜 맛을 알 수는 없다. 수박의 진짜 맛을 알고 싶으면 자신의 진짜 맛을 드러내 보일 수 있도록 수박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 할 것이다.
나는 길 위에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퇴직한 후에 또다시 순례길로 향할 것이다. 내가 20대 때 생각했던 것을 잘 실천하며 살았는지 점검해 보고 반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노년의 삶을 설계하기 위해서. 조용하고 느긋하게 생각하다가 올 것이다. 그때의 순례길은 내가 젊었을 때 걸었던 순례길과 어떻게 다를지 상당히 기대된다. 그 기대감을 원동력 삼아 오늘도 난 열심히 살아간다.
다음호 필봉계주를 이을 주인공은
해외사업개발처 아프리카사업부 이상원 직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