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자
최백호는 낭만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라고 노래했다. 헝가리의 도시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담고 있다. 탐스러운 골목길과 중세 교회, 도심을 가로지르는 실개천과 오래된 트램을 비추는 한낮의 따스한 햇살은 이방인의 눈에 낭만을 담는다. 잠시 머물러 그들의 일상을 엿보는 것 만으로도 일렁이는 감동이 마음속에 물드는 곳, 헝가리에 대하여.
[글·사진 서영진(여행칼럼니스트)]
부다페스트의 풍경은 아침에 가장 아름답다. 왕의 호흡이 담긴 부다 지구 언덕을 오르는 길은 가슴이 뛴다. 담장 너머로는 도나우강이 흐르고, 일상의 계단 끝자락에 왕조의 성곽이 홀연히 서 있다. 언덕 위의 돌길을 걸으면, 천년을 거스른 사연이 '달그락'거리며 귓가에 맴돈다. 13세기에 세워진 왕궁은 세계문화유산인 부다지구의 상징이자 시련의 흔적이다. 왕궁은 한때 몽골,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의해 훼손되는 상처를 입었다. 왕궁과 성채는 강변의 산책길로 이어지며 오랜 사연과 풍경을 덧씌우고 있다. 해 질 무렵에는 밤을 기다린 듯한 고풍스러운 카페가 문을 열고, 왕궁을 바라보며 하룻밤 잠을 청할 수 있는 숙소들이 불을 환하게 밝힌다. 아침에 눈을 떠 덜컹거리는 트램에 몸을 기대는 일, 야경을 탐미하며 강변을 서성이는 일, 부다페스트의 소소한 감동은 이런 일상 속에서 무르익는다.
도나우강변 '매혹의 부다페스트
왕궁의 흔적은 마차시 교회, 어부의 요새 등으로 이어진다.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마차시 교회는 카톨릭과 이슬람 사원의 스타일이 뒤섞여 있다. 어부의 요새에는 동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고깔 모양의 흰 탑들이 7개 솟아 있다. 고깔 탑은 헝가리 마자르 7개 부족을 상징하는데 웅장한 고성이나 성당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위용을 뽐낸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도나우강은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등 각국의 수도를 지나며 도시의 과거를 보듬는다. 도나우강을 기준으로 부다페스트 언덕 위 부다와 낮은 지대의 페스트는 원래 기반이 다른 별개의 도시였다. 두 도시가 하나의 수도로 융합된 것은 세체니 다리가 건설되면서부터다. 사자상이 지키는 세체니 다리는 부다페스트 배경의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주요 장면으로 친숙하다. 부다지구에서 다리를 건너면 곧장 페스트 지역으로 연결된다. 고딕양식의 헝가리 국회의사당과 보행자의 천국인 바치거리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강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풍기는 인상은 사뭇 다르다. 삶의 향기가 가득한 거리를 지나치는 주민들의 발걸음은 한결 빠르고 경쾌하다. 바치거리에는 명품숍과 기념품 가게가 들어섰고, 광장에는 악사들이 수준 높은 음악을 선사한다. 영웅광장 옆 시민공원 한가운데에는 고색창연한 세체니 온천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세체니 온천은 1931년에 문을 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온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휴일만 되면 주민들이 수건을 들고 중세풍의 건물로 들어서는 모습은 잠시나마 중세로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세계유산인 와인산지 토카이
품고 있는 시간만큼이나 육중한 부다페스트를 벗어나면 차창 밖은 느린 템포로 흘러간다. 헝가리 수도와 도나우강이 뿜어내는 현란한 광경은 소도시의 골목길에서는 변색된다. 부다페스트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와인으로 명성 높은 토카이 지역이 평원 너머 모습을 드러낸다. 동유럽의 와인산지를 대변하는 토카이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수백 년 세월의 와이너리와 창고들, 빛바랜 담장에서도 고풍스러운 향취가 묻어난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시끌벅적한 와이너리 투어를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소담한 돌길이 이어지고, 골목에는 덩굴 장식의 와인가게가 들어서 있다. 고요한 길을 백발의 노인이 오가는 나른한 풍경이다. 토카이 와인은 수확이 늦어 쪼그라든 포도를 숙성시켜 만들어 낸다. 품종은 대부분 청포도로, 한 모금 들이키면 전율이 흐를 정도의 단맛이 입안을 감싼다. 프랑스왕 루이 14세는 토카이 와인을 '와인의 왕'으로 칭송하기도 했다. 토카이 인근의 미슈콜츠는 성모 마리아의 순례 길을 품에 안은 도시다. 게롬볼리 교회, 에르세벳 광장 등은 중부유럽을 가로지른 1,400㎞ 순례길이 스쳐 가는 공간들이다. 실개천 흐르는 벤치에 걸터앉아 트램이 오가는 길목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시간은 봄 햇살만큼 더디게 흐른다.
왕비의 성곽 도시 베스프렘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등 내륙으로 둘러싸인 헝가리 사람들이 바다처럼 섬기는 게 발라톤 호수다. 헝가리 왕비의 발자취가 서린 베스프렘은 부다페스트 서쪽, 발라톤 호수의 훈풍이 닿는 곳에 자리했다. 베스프렘은 헝가리 초대 왕비가 살았고, 왕비들의 전설과 함께 즉위식이 열리던 곳이다. 지난밤 몸을 기댔던 호텔 이름도 '기젤라'로, 초대 왕비의 이름을 빌린 숙소였다. 별빛 아래 어슴푸레 보였던 거대한 형체는 왕비가 거닐던 성곽이었고, 왕과 왕비의 동상이 내려다보는 절벽 낮은 곳에 세인들은 몸을 눕히고. 젊은 연인은 성스럽게 입을 맞췄다. 베스프렘에서는 왕비를 추억하며 매년 봄 '기젤라 왕비의 축제'를 연다. 성채 골목길 끝자락에는 이 도시의 상징인 이스트반 왕과 기젤라 왕비의 동상이 서 있다. 사후 9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동상에서 내려다보는 베스프렘의 풍경은 아득하다. 붉은 지붕의 마을과 교회첨탑, 베네딕트 언덕이 어우러진 모습은 유럽 여느 도시들처럼 위압적이지 않다. 성곽 주변으로 시냇물과 숲이 어우러진 '새드 밸리'가 이어져 있다. 장엄함과 위압감 없이도 베스프렘의 풍경은 마음속으로 성큼 다가온다. 성곽 주변을 맴도는 시냇물과 숲의 향긋함처럼 여행자의 발걸음을 평온하게 쉬어가게 하는 곳. 베스프렘의 고요함은 그렇게 여행자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화려함과 반짝이는 여정의 마지막, 베스프렘 과 같은 나른한 휴식이 필요한 이유는 다시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행자의 조급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구를 생각하는 헝가리 여행
1. 걷기 여행
유럽 본토에서 가장 먼저 메트로가 개통된 곳은 부다페스트다. 1896년에 개통된 100년 세월의 메트로는 아직도 부다페스트의 땅속을 덜컹거리며 달린다. 세련되지 않아 투박하고, 문이 여닫힐 때마다 둔탁한 소리를 내지만 메트로, 트램을 이용하는 것이 권장된다.
2. 그린 티켓
부다페스트 여행의 흥미로운 점은 교외외곽으로 놀러 가는 용도로 쓰이는 '그린 티켓'이 있다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대폭 할인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그린티켓은 가족들의 자연으로의 나들이를 장려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3. 비닐봉지 금지
헝가리는 친환경 움직임에서도 선두주자다. 헝가리 상점에서 비닐봉지를 사용하려면 자연스럽게 세금을 물어야 한다. 헝가리는 2012년 다른 유럽연합(EU) 국가들에 앞서 비닐봉지에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헝가리 정부는 2021년부터 플라스틱 재질의 봉지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