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에 집중하느라 고단하던 시기에 소소한 낙이 되어주었던 것은 점심을 먹고 나서 엄마와 함께하던 티타임이었다. 다른 걱정들은 잠시 잊고 엄마와 도란도란 얘길 나누며 찻주전자를 비울 때까지 따뜻한 차를 다 마시고 나서야 오후를 시작하고는 했다. 그 습관이 이어져서 지금도 매일 사무실에서 한 잔씩은 차를 마신다. 나날이 새로운 향과 맛의 차를 맛보는 것은 일상 속의 작은 즐거움이 됐다. 차의 맛은 잠시 그 순간에 집중해서 천천히 마시지 않으면 음미하기 쉽지 않다. 그 몇십 초 사이 어떤 찻잎인지, 무엇이 블렌딩 된 차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면 차에 대한 경험도 조금씩 쌓여가고 취향에 대해서도 좀 더 또렷해진다. 내가 이 차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집중하는 그 순간은 나를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고, 행복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어떤 냄새나 맛으로 지난 좋았던 기억을 반추해내기도 한다. 차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나의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특별한 차를 만들어본다면 어떨까 하는 꿈으로 이어진다.
한여름 아침의 기분이 드는
연주를 위해
2015년의 8월 초였다. 교내 오케스트라 동아리는 가을 연주회를 위한 음악캠프를 기획했다. 30여 명의 단원들과 함께 며칠간 펜션에 틀어박혀 먹고, 합주하고, 먹고, 연습하고, 마시고, 합주하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연주회의 프로그램으로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 베토벤 교향곡 3번, 그리그 페르귄트 모음곡 1번,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을 준비했다.
음악캠프 하루의 시작은 아침 합주로 시작된다. 아침밥도 먹기 전에 일어나자마자 악기를 가지고 내려가면 1층 홀에서 A음으로 각자의 악기를 조율하고 있는 소리가 울린다. 지휘자님이 오시면 인사를 나누고 첫 번째 곡의 악보 페이지를 편다. 벽면의 유리창에서 흘러넘치는 아침 햇살이 홀을 가득 채운다. 잘게 떠다니는 먼지들이 보일 만큼 희뿌옇고 말간 햇살 속에서 페르귄트 모음곡 중 ‘아침의 기분’이 울려 퍼진다. 플루트와 오보에가 새벽빛으로 반짝이는 듯 부드러운 멜로디 라인을 주고받다가 모든 악기들이 함께 선율을 따라가는 부분이 오면 마음이 벅차올랐다.
한여름 아침의 오케스트라 선율과 어울리는 차를 만든다면, 퍼스트 플러시 다즐링에 녹차를 블렌딩해서 여름날 아침에 명상하는 듯한 맑은 수색과 담백하고 풋풋한 베이스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아침과 어울리는 노란 해바라기 꽃잎과, 우아한 보라색의 수레국화 꽃잎을 더한 뒤 복숭아 가향을 올려 싱그럽고 부드러운 꽃 향이 올라오게 마무리하고 싶다.
인도네시아의 푸른 숲과
따뜻한 계곡을 위해
2017년 9월에 싱가포르에서 만난 독일, 일본, 영국, 홍콩 교환학생 친구들과 9일간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인도네시아 도시인 자카르타, 반둥, 욕야카르타, 스마랑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8세기 경 건설된 인도네시아의 불교 사원인 프람 바난 사원, 보로부두르 사원 또한 종일 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던 것은 욕야카르타의 삔둘 동굴과 계곡에서 튜빙(tubing)을 했던 경험이다.
삔둘 동굴의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바깥은 계곡으로 이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튜브를 타고서 둥둥 물 위에 뜬 채로 동굴을 지나갔다. 한낮에도 어두운 동굴을 한참 동안 지나면, 천장이 둥글게 뚫려 바깥에서 빛이 환히 쏟아내려 오는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큰 규모의 특이한 구조를 가진 자연적 공간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마치 고대 신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후에는 계곡을 따라 튜브를 타고 물 위를 떠다녔다. 언젠가 놀이공원에서 테마파크로 재현해 놓았던 것만 같은 열대의 계곡이 훨씬 더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튜브 위에 누워 있으면 뜨끈한 오후의 볕이 피부를 어루만지듯 내리쬐고 미지근한 온도의 강물이 찰방이며 흐르는 소리가 새소리와 잔잔하게 섞인다. 눈앞은 온통 푸른 열대의 숲이다.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는 비슷한 토양을 가졌기에 생산되는 홍차의 특징도 닮아있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가장 저지대에서 생산되는 홍차인 루후나에 열대과일인 말린 파인애플이나 패션후르츠 조각을 블렌딩 해본다면. 저지대의 깊은 감칠맛과 열대과일의 향미를 가진 차에서 그 느릿하게 평온하고 따사로웠던 풍경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을 찾아서
내가 찾아가고 있는 행복의 방향은 피트 닥터 감독의 영화 ‘소울’에서 전하는 메시지와 닮았다. 일상의 조각에서 나의 기호가 어떤 것인지 탐색해보면서 나의 조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취미든지 간에 그 안에서도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 즐겁다. 그 과정에는 더 맛보고, 찾아가 보고, 분석해보고, 만들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체험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내 마음에 드는 차들을 많이 만나보며 내가 가진 행복에 새로운 행복을 더하는 경험을 하는 날들이 계속 기대된다.
다음호 필봉계주(筆鋒繼走)의 주인공은 당진기지안전건설단 안전부 최주형 직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