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자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일상은 눈부시다. 지중해의 햇살은 골목 발코니와 투박한 노천 바에 선명하게 내려앉는다. 오렌지 나무 너머 중세의 건축물들이 다가서고, 번잡하지 않은 마을에는 낭만과 축제가 녹아든다.
[글·사진 서영진(여행칼럼니스트)]
더딘 시간의 마을, 로스로마네스
안달루시아 로스로마네스는 언덕 위 호숫가 마을이다. 마을 꼭대기에는 두 평 남짓한 노천 바가 있다. 정열, 태양의 안달루시아를 꿈꿨다면 이 마을만큼은 예외다. 빨래가 휘날리고, 해가 저물면 삼삼오오 주민들이 바에 모여든다. 은퇴 후 타지에 온 영국인들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스페인 할아버지는 묵묵히 공간을 공유하며 저녁시간을 보낸다. 시골 동네지만 노천 바에서는 마을 단위 맥주도 판매한다. 맥주 이름은 '로마네스'다. 비뉴엘라 호수를 바라보며 바에서 기울이는 로스로마네스 맥주는 취기가 다르다. 현지인들에게 로스로마네스는 올리브 재배의 땅이다. 농가 주변으로 올리브밭이 듬성듬성 펼쳐져 있다. 마을 안에 들어선 유일한 공장은 올리브를 가공하는 곳이다. 해 질 녘이면 그날 수확한 올리브를 짜내 기 위해 공장 앞길에 트럭 줄이 늘어서고, 촌부들은 노을을 배경 삼아두런두런 대화를 나눈다. 비뉴엘라 호수의 파문처럼, 로스로마네스에서의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로마로마네스 인근, 중세풍의 안테케라 역시 묵묵히 세월을 강변한다. 남부 내륙 교역의 중심이었던 안테케라는 봉긋봉긋 솟은 건물이 죄다 교회 탑들이다. 스페인식 바로크 교회만 30여 개다. 중세도시는 성곽과 진흙 빛 돌담으로 채워진다. 더 오래된 돌덩이들은 안테케라 외곽에 들어서 있다. '엘 토르칼'로 불리는 기암괴석 석회암 지형은 1 억6천만 년의 흔적을 지녔다. 돌산 정상에 오르면 안테케라가 소박하게 내려다보인다.
'스페인의 산토리니' 프리힐리아나
로스로마네스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면 지중해의 도시와 맞닥뜨린다. 네르하는 툭 튀어나온 절벽해안인 '유럽의 발코니'를 간직한 해변 도시다. 칼라온다 비치를 찾은 이방인들은 레스토랑에서 '메누 델 디아'(오늘의 메뉴)를 주문한다. 음식에는 해산물이 가득 갖춰 나온다. 스페인 사람들의 '메누 델 디아'에는 점심이 그날의 가장 중요한 식사라는 철학이 담겨 있다. 네르하에서는 누구나 지중해의 푸른 바다에 자동입수다. 내륙으로 멀리 보이는 설산은 그라나다의 배경인 시에라 네바다 산줄기다. 네르하의 프리힐리아나 마을은 '스페인의 산토리니'로 불린다. 지중해를 잇는 태양의 도로 '코스타 델 쏠'을 달리면 하얀색으로 치장된 마을이 여러 곳이다. 그중 프리힐리아나는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골 동네로 뽑힌 곳이다. 골목은 대문이며 간판이며 예쁘게 치장됐다. 파스텔톤 목재 문에 도마뱀 문고리, 모자이크 담장에 빨간 제라늄이 선명하다. 아기자기한 기념품가게와 산 안토니오 교회도 운치 있다. 언덕 위 투숙객들을 위해 당나귀는 짐을 실어 나른다. 16세기 중반 그라나다에서 추방된 무어인들은 이 동네에 머물며 반란을 일으켰다. 마을 분위기와는 달리역사는 지난하다. 프리힐리아나에서는 매년 6월 수호성인 산 안토니오 데 파두아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꽃을 단 여인들의 순례행렬이 볼만하다. 8월 말 에는 마을에 간직된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세 문화가 한데 어울리는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화려한 카니발의 도시, 카디스
본격적인 축제는 남서부 항구도시 카디스가 주 무대다. '낭만, 햇살, 정열'. 안달루시아의 메인 모토는 이 도시에서 강렬하다. 해상무역과 돈, 예쁜 여인들로 명성 높은 카디스는 봄이면 페스티벌로 시끌벅적하다. 주민들은 분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한다. 카디스에서 지브롤터해협만 건너면 아프리카다. 카니발 기간에는 무르가(murga)로 불리는 연회자들이 트랙터를 무대삼아 공연을 펼친다. 한 편의 뮤지컬을 보듯 수준급이다. 10여 팀의 마을단위 참가자들은 엄격한 지역 예선을 거쳐 트랙터 무대에 오른다. 스머프, 경찰 복장 등 의상도 제각각이다. 구경꾼들은 즉석에서 맥주를 건네고 가수들은 목을 축인 뒤 발그레한 얼굴로 또 목청을 높인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카디스 페스티벌을 베네치아 가면카니발과 쌍 벽을 이루는 유럽의 축제로 꼽는다. 카니발에는 풍자와 노래, 알코올이 뒤섞인다. 공식 무르가들 외에도 거리로 나와 연극이나 노래를 선보이는 무리도 골목마다 가득하다. 시청사나 광장도 카니발 조형물로 한껏 단장된다. 카디스 구도심의 아바스토스 시장은 칼레타 해변과 더불어 꼭 들러야 할 명소다. 항구도시답게 장터에는 해산물이 가득하며 식당에는 올리브유로 튀겨낸 '페스카이토 프리토'(생선튀김)가 안주로 곁들여진다.
'안달루시아의 꽃', 낭만의 세비야
카디스의 열기는 북쪽 세비야에서 무르익는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의 중심도시이자 플라멩코와 투우의 본고장이다. 오페라 '카르멘'과'세비야의 이발사'의 무대이며, 마젤란 세계 일주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스페인 국민 음식인 하몽(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시킨 스페인의 생햄)과 초콜릿을 듬뿍 얹은 추로스도 세비야에서 먹어야 제격이다. 세비야에서는 발을 내딛는 골목 곳곳이 낭만으로 채색된다. 스페인최대의 대성당 옆, 더디게 흐르는 노면전차 뒤로는 나무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렸다. 시에르페스 거리 등 도심 골목의 바들은 새벽까지 불야성을 이룬다. 20세기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웠던 '알폰소 13세' 호텔은 세비야 대학교 옆에 들어서 있다. 건물 전체가 안달루시아 전통 건축양식인 호텔은 예전에는 왕의 초대를 받은 대통령과 왕족들만 묵을 수 있었다. 에스파냐 광장에서는 매일 플라멩코 공연이 열린다.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 강변에는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사데 토로스' 투우장도 있다. 세비야에서는 도시의 새로운 건축물인 메트로폴파라솔의 기괴한 외관 아래 휴식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예쁜 정원이 숨은 산타크루스 지구의 미로를 배회하는 것도 흥미롭다. 이사벨 여왕 다리 건너트리아나 지구는 토박이 세비야 사람들의 향취로 채워진다. 세비야여느 레스토랑에 들어서도 하몽 덩어리는 와인과 함께 주방에 매달려 있다. 상그리아(포도주에 소다수와 레몬즙을 넣어 희석시켜 만든 스페인의 전통 칵테일 음료)에 타파스(에스파냐 전채요리) 한 조각마저도 한결 더 달콤한 도시가 바로 세비야다.
지구를 생각하는 스페인 남부 여행
1. 배기가스 규제지역 '그린존'
스페인 남부를 차량으로 둘러볼 요량이면 '그린존'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그린존은 도시 환경을 위해 배기가스를 규제하는 지역으로 여행 중에 방문하려면 소정의 환경세를 지불하고 환경스티커를 부착해야 한다. 최근 유럽 전역에 환경문제가 화두로 등장하면서 구도심을 간직한 도시들은 그린존-환경세 제도를 점차 도입하고 있다.
2. 환경과 유산을 위한 도보 여행
스페인에서는 지중해와 옛 유적들을 아끼려는 노력도 열심이다. 지중해 연안은 훼손되는 바다를 보호하기 위한 캠페인과 시위가 단골로 열리는 곳이다. 안테케라 등 오래된 도시에서는 무분별한 도로 확장을 자제하고, 관광객들에게는 도심에서 차량보다는 도보로 이동할것을 권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감시를 '시민보안관'(Gardia civil)이 맡고 있다.
3. 일회용품 사용 규제
스페인에서는 일회용품 사용이 제한된다. 스페인에서는 캡슐커피의 인기가 높은데 재활용이 안 되는 플라스틱 캡슐의 무분별한 사용은 금지하는 추세다. 빨대, 컵, 접시 등 모든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의 판매를 제한하는 법안도 2020년까지 마련할 계획이다. 특급호텔 등에서도 간단한 비누 외에 일회용품 서비스는 찾아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