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미지. 네이버영화
위대한 업적 앞에 마주한 과학의 양면성
20세기에 성취한 인류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은 무엇일까? 세 가지만 꼽자면 원자폭탄, 트랜지스터 그리고 페니실린 아닐까 한다. 트랜지스터와 페니실린은 인류 문명의 발전과 생명을 지켜온 과학적 업적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 원자폭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원자폭탄은 양자역학이라는 이론과 최첨단 실험으로 단련된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최단 시간에 만든 최고의 과학적 발명품임에 틀림이 없다. 결과적으로 이 발명품은 전쟁을 종식시켰고 잠재적 평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순간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가공할 만한 전쟁 무기는 분명 인류의 재앙이었다. 최고의 과학적 업적이면서도 무고한 생명을 필연적으로 희생시키는 무기, 원자폭탄. 이 두 양면적 진실이 공존하는 상황은 과학의 발전과 윤리적 문제라는 상보적 모순을 만들어냈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뉴멕시코주 알라모골드에서 최초의 플루토늄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이 프로젝트를 책임진 물리학자는 오펜하이머였다. 오펜하이머는 그 순간 시인 존 던의 시 구절을 속으로 되뇌었다.
“한 장의 지도 속에는 동과 서가 마찬가지이듯 죽음도 부활과 이웃하고 있네.”
죽음에 이르지만, 또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의 시 구절이다. 그는 죽음의 의미를 부활로 받아들인 것일까? 그는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종식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인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이 섬뜩한 양면적 모순과 과학자의 윤리 문제는 평생 그를 고통에 빠트렸다. 폭발 지점으로부터 약 9km 떨어진 참호 속에서 폭발을 지켜본 오펜하이머는 성공의 환희보다도 과학자의 윤리적 원죄를 가장 먼저 인식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과학자는 죄를 알게 되었다.”라는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앞으로 진행될 핵 시대의 위험성과 핵이 지닌 부정적 측면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분명 그는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 깊이 통찰한 과학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생은 핵의 국제관리에 집중되었다. 그는 평화가 과학 발전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피하는 것만이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핵의 국제관리 협정을 가능한 한 빨리 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개발한 폭탄은 그의 손을 이미 떠난 상태였다. 미국 헌법에 따라, 합중국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원자폭탄의 권한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원자폭탄에 대해 그 어떤 권한도 없었지만, 과학자로서 무한의 윤리적 책임을 떠안아야 했다.
인류를 위해 더 큰 파괴력이 필요하다는 아이러니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하자 세상은 파괴력이 더 큰 수소폭탄의 개발을 요구했다.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을 적극 반대했다. 그는 수소폭탄이 무한한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에, 그것이 몰고 올 무고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을 크게 우려했다. 수소폭탄은 집단학살, 대량학살 무기였다. 하지만 오펜하이머 반대파는 ‘무기 어느 곳에 도덕성이 존재하느냐?’라고 반응할 뿐이었고, 1950년 트루먼 대통령은 수소폭탄 개발 추진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수소폭탄 개발이 시작되자 오펜하이머는 곤경에 빠졌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그를 숭배했던 에드워드 텔러는 오펜하이머가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그를 배신했다. 오펜하이머 때문에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이 늦어졌고 그의 공산주의적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하지만 양심적인 물리학자들은 수소폭탄 제조가 늦어진 이유는 오펜하이머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계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점점 격화되는 냉전 체제로 인해 역사는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그 결과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연구소 소장직만을 유지한 채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어 암울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실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오펜하이머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닐스 보어였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양자역학을 이해한 첫 번째 미국인이자, 닐스 보어 밑에서 박사 후 과정을 이수한 물리학자였다.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버클리 분교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오가며 학생들에게 양자역학을 가르쳤다. 당시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순진해서 강한 좌익적 색채를 가졌다. 하지만 그는 낭만적인 인간이었다. 세상사에 다소 부주의한 철모르는 이론 물리학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의 책임을 맡은 후부터는 행정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우수한 연구소 소장직을 수행했다. 원자폭탄 개발에 뛰어들자 그는 최고의 젊은 물리학자를 스카우트하기 시작했다. 젊은 물리학자들 중 스카우트 전후로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무려 여섯 명이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의 미래를 위해 석박사과정 학생들을 비롯하여 학부생에게도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당시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3,000여 명 연구원들의 평균 연령이 29세였다는 점만 봐도, 능력과 잠재력을 최우선시하는 연구소장의 과학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낙관적 기대에 힘을 실어야 할 때
원자폭탄의 성공적이고 신속한 개발은 과학자들에게 돈만 쥐어주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신속히 개발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로 과학적 이론과 기술이 무르익은 시기였다. 양자역학의 발전과 원자핵을 둘러싼 여러 가지 발견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져 기술적으로 좋은 환경이었다. 더욱이 아인슈타인을 포함해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가 참여했다. 둘째로 확실한 공동의 적이 존재했다. 정치적으로 히틀러의 극악한 만행을 막기 위한 수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현재, 지구상 최고의 과학적 지식이 낳은 원자폭탄은 과학자의 손을 떠나 정치가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개발한 과학자는 윤리적 책임을 떠안았다. 1903년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피에르 퀴리는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남겼다. “범죄자에 손에 방사능 물질이 들어가면 매우 위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비밀을 알게 되는 일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인지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이익을 얻게 될지 아니면 인간에게 재앙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의 발견의 예가 이 일을 전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위대한 힘의 폭발이 위대한 일을 성취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국가를 전쟁으로 몰고 가 무서운 파괴의 수단으로 쓰일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도 노벨과 함께 새로운 발견이 인류를 더 좋은 상태로 끌고 가게 될 것으로 믿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120년 전 피에르 퀴리의 말은 그 당시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자각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예언적 경고로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낙관주의적인 기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인류 사상 최초로 인류 전체를 파멸시켜버릴 수 있는 원자폭탄 개발자로 기억되고 매도당하리라는 것을 예측했을까? 아니면 그도 노벨과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의 발명이 인류를 더 좋은 상태로 끌고 가게 될 것으로 믿었을까?
그는 지구상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의 유해는 그의 부인에 의해 화장이 되어 그가 생전에 배를 몰고 다니던 버진 군도 사이의 바다에 뿌려졌다. 물리학자이자 뱃사람이고, 철학자, 마술가, 언어학자이자 최고의 요리사, 최고의 와인 소믈리에였으며, 몇 개 국어를 구사하는지 모를 정도로 언어에 천재적이었던 시 애호가 오펜하이머.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낭만적 물리학자나 뱃사람이 아니라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가 인정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