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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심리학


우리는 모두 '의'를 바라고 '불의'를 싫어한다. 진화적 본성이다. 물론 '의'의 기준은 나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완전히 천차만별은 아니다. 공평과 정의, 자애와 배려에 관한 소망은 누구나 비슷하다. 하지만 세상의 여러 '부당한' 일을 접하면서 점점 젊은 시절의 의분은 사라지고 마음은 차갑게 식는다. 습관화된 체념과 무기력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글 박한선 교수]



박한선(신경인류학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 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등을 썼다.

시시포스의 신화

시시포스는 코린토스의 왕이었다. 트로이 전쟁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다. 시시포스는 아주 영리했는데, 죽음의 신을 꽁꽁 묶어 오래 사는 책략을 꾸몄다. 신의 영역을 넘본 죄로 영원한 천벌을 받았다.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벌이다. 겨우겨우 안간힘을 써서 꼭대기에 도달하는 순간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진다.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에 관해 이야기했다. 부조리는 '부조리하게도'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차별과 터무니없는 거짓말, 부당한 억압적 관계 등 모순으로 가득한 삶은 단지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구도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문 가판대를 장식하는 수많은 사건. 그러나 5년 전, 10년 전 신문에도 놀랍도록 비슷한 사건이 늘 있었다. 주인공과 무대는 바뀌지만 극본은 그대로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데, 과연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비정상적인 사건에 대해 늘 냉정을 지키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보통 사람은 병적인 상황을 직면하면 몇 가지 전형적인 반응을 보인다. 일단 혐오와 분노에 휩싸인다. 자신과 이웃, 세상 전체를 미워하는 것이다. 걸핏하면 욕하고 싸운다.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듯이 냉소적인 태도로 등을 돌린다. 역시 건강한 반응은 아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은 어느 날 아우슈비츠에 갇힌다. 살아서는 나올 수 없는 곳. 어머니와 형, 아내는 모두 수용소에서 죽었다.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는 그곳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결국 모두 죽고 말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한때 오스트리아 빈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던 프랭클은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방금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감정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중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채 갔다. 어떤 사람은 시신이 신고 있는 나무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는지 신발을 바꾸어 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진짜 구두끈을 가지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무감각은 어떤 의미에서 반전된 분노인지도 모른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사람은 그러한 불의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하면 우리는 종종 감정적 관심을 끄고 사소한 기쁨에 몰두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이 바로 그랬다.

집행 유예 망상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이나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질병을 앓고, 사고를 당하며 죽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죽음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이 하루를 살아간다. 작은 기쁨에 집착하며 운명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다. 종종 사형수는 이른바 집행유예 망상에 빠진다. 처형 직전 집행이 취소되리라는 망상이다. "장밋빛으로 펼쳐진 새로운 세상이 그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을 했다. 소호의 옛집으로 돌아간 그는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는 아내, 루시마네뜨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해방감과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하였다. 루시가 그간의 일은 모두 꿈이며, 그는 한 번도 런던을 떠난 적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중략) 그는 잠에서 깨어났지만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 내가 죽는 날이 밝았구나."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찰스 다네이가 사형 집행 전 날 꾼 꿈이다. 삶의 부조리에 무감각해진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집행유예 망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을 자신과 분리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 현학적인 논리 등을 통해서 자신만은 자유롭거나 혹은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마음대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세상이 우리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처럼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를 저지르는' 식으로 세상을 제멋대로 바꾸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선하고 옳은 방향이라고 해서 세상이 반드시 그렇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왜 얼른 '내 뜻대로' 세상이 바뀌지 않느냐고 항의해봐야 소용없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태도뿐이다. 아우슈비츠에 수감 중이던 유대인 한 명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1945년 3월 30일에 수용소에서 해방되고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계시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꿈을 계시로 생각하며 제멋대로 믿은 것이다. 그 남자는 3월 29일부터 갑자기 열이 나더니, 이틀 만에 발진티푸스로 죽고 말았다. 약속된 그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기대한 해방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한 나머지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사람에게 절대 허락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생이 언제 끝나는지'를 아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말이다. 우리는 운명의 지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 빅터 프랭클은 이를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하였다. 어떤 면에서 현대인의 삶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삶과 닮았다. 언제 해고될지, 언제 이혼 당할지, 언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을지 알지 못한 채, 위부터 아래까지 온통 부조리한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누구는 화를 내고 분노한다. 누구는 혀끝에서 맛있는 것,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일만 찾으며 현실에서 도망친다. 허황된 축복과 믿을 수 없는 내세를 약속하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도 한다. 절망은 부조리하고 일시적인 삶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시작한다. 프랭클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대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누구도 우리를 시련에서 구해줄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지지도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태도, 즉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뿐이다. 영원히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만이 이방인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사회는 항상 다양한 분노로 끓어오른다. 모든 이가 겪고 있는 일이지만, 개개인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모두 다르다. 부조리한 인간의 삶과 그 조건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삶의 상황에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한다. 화를 내며 폭력적인 행동으로 답할 수도 있다.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외면할 수도 있다. 기적적인 상황 타개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할 수도, 공황이나 전쟁과 같은 파국적인 예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바뀔 수 없지만, 세상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은 삶을 다룬 영화 셋

레인 오버 미

  • 장르 : 드라마
  • 감독 : 마이크 바인더
  • 출연 : 아담 샌들러, 돈 치들

9.11테러로 소우주였던 가족을 잃은 찰리는 과거를 철저히 외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게임을 하고 코믹영화를 보고 엉뚱한 음악을 듣고,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실없는 농담으로 채우는 것이 그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학창시절 친구 앨런은 그런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고, 찰리는 다시 세상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 장르 | 드라마
  • 감독 | 레니 에이브러햄슨
  • 출연 | 브리 라슨, 제이콥 트렘블레이

7년 전, 열일곱 살이던 조이는 길에서 낯선 남자에게 납치돼 작은 방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다 아들 잭을 낳고 엄마가 된다. 잭의 다섯 살 생일날, 태어나 단 한 번도 바깥세상을 본 적 없는 아들을 좁은 방에 가둬둘 수 없다고 판단한 조이는 잭과 함께 방 밖으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까?

인생은 아름다워

  • 장르 : 드라마
  • 감독 : 로베르토 베니니
  • 출연 : 로베르토 베니니, 니콜레타 브라스키

유대계 이탈리아인 귀도는 로마에 상경해 운명처럼 도라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이른다. 몇 년 뒤 아들 조슈아가 태어나고 행복한 나날을 이어가다 조슈아의 다섯 번째 생일날, 귀도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수용소 행 기차를 타게 된다. 귀도는 조슈아에게 수용소 생활을 게임이라 속이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