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심리학
그 일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 없다. 가슴이 꼭 조이도록 고통스럽고, 밤에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일도 다반사. 절대 잊지 않고 응어리진 마음을 갚아줄 작정이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 그렇게 결심만 한 지 벌써 몇 년째다.
[글 박한선 (신경인류학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글 박한선 (신경인류학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 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등을 썼다.
지워지지 않는 원한
앙심 혹은 원한을 품고 있는 대상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가슴에 응어리진 오랜 상처다. 쿨하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방송을 보니 트라우마라는 말을 많이 하던데, 이런 것을 트라우마라고 하는 걸까? 뭐.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산 성인이라면 알게 모르게 남에게 상처 준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라는 것이 주관적인 것이니, 때린 사람은 잊어도 맞은 사람은 못 잊는다. 무심코 상처 준 일과 상처받은 일을 합하면 대략 엇비슷할 것이다. 너무 억울한 일만 당했다고 우길 것은 아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 일이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수십 년 전 학창 시절에 괴롭힘을 당했다며 아직도 이를 북북 갈고 있는 영수 씨. 물론 기억하기도 싫은 경험이겠지만, 벌써 삼십 년이 흘렀다.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사과를 받아내야 할까? 그도 이제 마흔 중반의 중년이다. 열세 살 무렵의 네가 나를 툭하면 망신 주고 때리지 않았냐며 항의하면 속이 시원할까? 아마 나를 기억도 못할 것이다. 설령 사과를 받아내도 후련하지 않다. 수십 년 동안 혼자 전전긍긍했던 기억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앙심은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평생토록 같은 소절을 반복한다. 학창시절 친구들끼리 상처를 주고받은 경험을 모조리 보상해야 한다면, 차라리 학교 같은 곳은 다니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 부딪히고 싸우고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세상을 배우는 곳이 학교이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시기가 학창시절이다. 물론 상습적이고 도를 넘은 학교 폭력이라면 예외지만 말이다. 원한은 사실 부정적인 정서가 덧입혀진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원시 시대부터 인류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았고, 자신에게 해를 입힌 대상을 정확하게 기억하도록 적응했다. 원한도 앙심도 없는 천사표 원시인은 아마 똑같은 나쁜 놈에게 계속 이용당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대상에 대한 기억은, 그 반대에 비해서, 아주 강렬하고 오래간다. 당연한 이치다. 인간은 뒤끝 있는 존재다.
앙심의 역설
하지만 앙심은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나 누이를 겁탈한 도적에게 향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한 수준의 고통에 앙심을 품는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이 가진 일반적인 앙심은 그런 '천하의 대역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집이 가난해서 도시락에 매일 형편없는 반찬을 싸 왔죠. 그런데 그 녀석이 '이건 개밥이냐'라고 놀린 거예요. 중학교 2학년이니 그런 장난도 칠 법하지만, 지금도 절대 잊을 수 없어요." "학교 축제였어요. 이웃 학교 여학생이 많이 놀러 왔는데, 그 녀석이 제 바지를 확 벗겼어요. 많은 여학생 앞에서 팬티 바람으로…" 사려 깊지 못한 청소년기의 실수나 시트콤 소재 같은 이야기다. 남들의 이야기라면 웃고 넘어가겠는데, 자기 일이라면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지금도 도시락 가게를 지나거나 학교 축제 현수막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분통이 터진다. 분명 '쿨'한 태도는 아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다. 앙심은 흔히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생애사적 과업과 관련돼 나타난다. 사춘기에는 이성 앞에서 겪었던 슬픔이, 성인기 초반에는 동료와의 경쟁에서 겪는 좌절이, 중장년기에는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한 수치심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십대 무렵의 첫사랑의 아픔, 첫 직장에서 만난 선배의 무서운 질책, 지긋한 나이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의 성공이 유독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마 오랜 옛날에는 사춘기에 짝을 찾지 못하거나 젊은 무리에서 리더가 되지 못하거나 나이가 들어 부족의 장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개인에게 대단한 불이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진화적으로 말해서 낮은 적합도와 직결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각자의 나이에 따라 이성에 대한 관심, 동료와의 경쟁, 세상의 인정이라는 과업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한 과업을 방해한 대상에게는 깊은 원한이 쌓인다. 앙심의 역설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제 유효기간이 끝나버렸다.
약자 자처의 심리
아이러니하게도 앙심은 흔히 약자 자처의 심리로 이어진다. 원래 응원하는 팀이 없을 때, 우리는 흔히 지고 있는 팀을 응원한다. 이기고 있는 팀이 더 압도적인 점수 차로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별로없다. 우리 마음속에서 종종 강자는 타자로, 약자는 자신으로 동일시된다. 하지만 조금 그래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역전승이 훨씬 재미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자신이 직접 뛰는 경기에서도 약자자처의 함정에 빠지면 곤란하다. 자기 팀이 이기는 것이 당연히 좋은 일이다. 상대가 약자라고 일부러 져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앙심과 원한이 깊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타인에게 피해를 받고,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이 앙심과 원한을 정당화하는 방법으로 이용된다. 급기야는 자기 삶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을 오랜 원한의 대상에게 전부 전가한다. 결혼도 못 하고, 취직도 못 하고, 가난하게 사는 이유는 바로 38년 전 ○○중학교 김철수가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세상은 강자요, 자신은 약자다. 약자 자처, 강자 배척의 심리는 결국 강자인 세상 전체를 미워하는 심리로 발전한다. 자신을 제외한 인간 모두를 혐오하고, 세상 전체를 증오하는 것이다. 자신은 언제나 착한 피해자로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쿨하게 사는 법
인생은 분명 수지맞는 장사다. 세상이 나에게 해주는 것이 훨씬 많다.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다들 비슷하니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연의 아픔이나 낙방의 고통처럼 슬프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프러포즈한 이성은 무조건 나에 대한 사랑에 빠지고, 지원한 직장은 반드시 나를 뽑아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깨질 것이다. 하지만 실연을 당하다 보면 제 짝을 만나게 되고, 구직하다 보면 직장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믿음은 언젠가 이뤄질 것이다. 원한이 맺힐 정도로 미운 사람이 아마 한 명쯤은 다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분명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모든 사람은 나를 좋아해야 한다는 유아기적 믿음은 버리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슬프고 분통 터지는 기억을 지우고, 원한의 대상을 내 삶에서 떠나보내자. 그러나 세상에는 분명 나를 이유 없이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철천지원수를 마음속에서 내보내고 나면, 나를 좋아하는 그 사람이 자리에 차지할 것이다. 흔히 성질을 불같이 내고는 '나는 그래도 뒤끝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데, 그건 뒤끝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즉흥적인 것이다.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불같이 성을 낼 이유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원한을 품을 이유도 없다. 쿨한 삶이란, 세상이 전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모두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뒤끝과 화해 사이'를 다룬 영화 셋
영주
- 장르 | 드라마
- 감독 | 차성덕
- 출연 | 김향기, 김호정, 유재명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졸지에 가장이 된 열아홉의 영주. 학업도 포기한 채 동생 영인을 돌보며 살아가는 영주의 노력에도 영인은 어긋나기만 하고, 급기야 사고 합의금까지 물어야 할판이다. 교통사고만 없었다면 행복했을지 모를 영주의 삶. 영주는 복수를 위해 교통사고 가해자인 상문을 찾아가지만, 죄책감에 살아가는 그들 삶에 섞여 점점 가족애를 느끼게 된다.
내 마음을 벗어난 시간
- 장르 | 드라마
- 감독 | 오렌 무버만
- 출연 | 리차드 기어, 지나 말론
정신없이 돌아가는 뉴욕 맨해튼에서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살아가는 조지. 아내를 잃고 집, 직장, 딸까지도 모두 놓아버린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딸 매기 곁을 서성이며 몰래 그녀를 지켜보는 것. 매기는 젊은 시절 가족을 내팽개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지만 정작 노숙자가 돼 돌아온 아버지 모습은 혼란스럽다. 과연 이들의 거리는 좁혀질 수 있을까.
아이 필 프리티
- 장르 : 코미디
- 감독 : 에비 콘, 마크 실버스테인
- 출연 : 에이미 슈머, 미셸 윌리엄스
성격 좋고 유쾌하지만 얼굴과 몸매 때문에 자신감을 발휘하지 못하는 르네. 어느 날 스피닝센터를 찾게 된 그녀는 페달을 너무 열심히 밟다가 페달이 고장 나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라커룸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몰라보게 아름다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이후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진다. 정말 달라진 건 그녀일까 그녀의 마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