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자
노을, 바다, 와인…. 호주 서부에서는 '격리된 감동'에 사로잡힌다. 사막과 바다 사이의 도시들은 심장박동을 부추기는 대자연의 감동이 덧씌워진다. 외딴 마을들은 남반구의 문화와 생태를 간직한 골목과 해변, 와이너리까지 보듬고 있다.
[글·사진 서영진(여행칼럼니스트)]
브룸에서 맞는 전율의 노을
호주 서북부 브룸은 바다와 하늘이 그려낸 경이로운 노을을 간직한 땅이다. 바다 위 선홍빛 석양, 낙타의 행렬, 진주잡이의 사연까지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아득한 해변이 이어진 브룸 케이블 비치는 일몰이 매혹적이다. 해 질녘이면 모래 위에 간이 의자를 펼친 채 와인을 기울이는 이방인들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석양 사이로 돛단배가 지나고, 바다와 연결된 경계선에서 낙타들은 석양의 해변을 뚜벅뚜벅 걸으며 그림자와 여운을 남긴다. 케이블 비치의 해넘이에 시간과 몸을 기대면 '생애 최고 노을'의 순서는 슬며시 뒤바뀐다.
자연을 품은 사람들의 땅
노을 이전의 브룸은 '진주잡이의 땅'으로 명성 높았다. 1880년대부터 진주를 채취하기 위해 일본인을 필두로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등이 몰려왔고 눈망울만한 자연산 진주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진주잡이 다이버들은 시내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채취하다 숨져간 일본인들을 기리는 묘지가 시내에 있고 도심 한가운데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 진주 채취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투어는 여행자들에게 큰 매력이다. 맹그로브 숲이 펼쳐진 양식장에서는 진주를 지키는 악어를 만나게 된다. 브룸에는 1916년 문을 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야외 영화관도 있다. '선 픽처스'라는 노천 영화관에서는 쏟아지는 별과 함께 마당의자에 앉아 스크린에 빠져드는 오붓한 시간이 주어진다. 브룸의 경이로움은 외곽으로 접어들며 무르익는다. 서호주 최북단 푸눌룰루 국립공원의 벙글벙글은 2억 5천만 년 전에 형성된 세계자 연유산인 사암 지형이다. 호주에 남겨진 마지막 미개척지로, 사암 단층은 수백만 개의 벌통을 늘어놓은 듯 기이한 지형을 간직하고 있다.
일상과 해변이 어우러진 퍼스
서호주의 남쪽으로 내려서면 중심도시 퍼스와 조우한다. 퍼스는 서쪽으로는 인도양이, 동쪽으로는 끝없는 사막이 펼쳐진 외로운 도시다. 골드러시로 단초를 다진 땅은 격리된 여유로움 속에서 호주 내에 그들만의 문화를 잉태했다.퍼스에서는 일상과 휴식, 이벤트가 큰 경계 없이 진행된다. 중심가에서 철로 하나만 지나면 강렬한 문화의 거리로 이어지고, 차를 타고 20여 분 달리면 훈풍이 부는 해변과 맞닿는다. 번화가에서 가깝게 와닿는 바닷가는 고요하고 아득하다. 그중 코슬로우 비치는 호주 출신의 영화배우인 히스 레저가 산책 삼아 즐겨 찾던 해변이다. 이곳에서는 남반구 최대의 예술축제인 퍼스 국제 아트페스티벌 개막식이 열렸다. 머레이 스트리트, 헤이 스트리트 등은 퍼스 최대의 중심가이자 쇼핑의 거리다. 현지 디자이너숍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킹스 스트리트 역시 명품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뒷골목 문화와 '친근한' 와이너리
퍼스가 더욱더 이채로운 것은 다운타운에서 걸어서 10분, 철로 하나만 지나면 문화적 깊이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흡사 서울의 명동과 홍대거리가 철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공존하는 형국이다. 다국적 식당들과 '나이트 라이프'로 명성 높았던 노스브리지 일대는 퍼스의 새롭고 당당한 문화허브로 자리매김했다. 노천 바와 노천영화관, 노천 콘서트장 등은 노스브리지의 주말을 단장하는 주요 아이콘이다. 노천광장 소파에 누워 영화를 감상하는 풍경이나 오래된 공장 담벼락 너머로 흐르는 음악은 노스브리지를 거니는 이방인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다. 사실 그동안 퍼스를 감상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남반구 최대의 도심공원인 킹스파크와 종 모양의 현대 건축물인 스완벨 타워 등을 둘러보는 것이 주를 이뤘다. 요즘은 작은 와인 바나 식당들이 도심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주역을 자처하고 있다. 숨은그림찾기처럼 '개성 넘치는바'들을 찾는 행위는 이곳 청춘들의 이색취미이자 퍼스 여행의 새로운 묘미다. 바에서 맛보는 와인은 스완강에서 연결되는 스완밸리나 남서부 마가렛 리버의 마을 단위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친근한' 것들이다.
프리맨틀의 카푸치노 거리
스완강을 따라 페리로 30분이면 닿는 프리맨틀은 퍼스 여행의 향취를 더한다. 프리맨틀은 진한 바다 내음과 커피 향이 묻어나는 소도시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거리 이름도 '카푸치노 거리'다. 시청사가 들어선 킹스스퀘어 광장에서 10여 분 거닐면 노천카페가 줄지어 들어선 카푸치노 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굳이 이 골목까지 발길을 옮긴다. 이곳에서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것은 분위기에 취하려는 여행자들의 선택이다. 서호주의 청춘들은 카푸치노보다는 라떼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에스프레소 샷이 추가된 '플랫화이트'를 즐겨 마신다. 낭만의 거리는 예전 죄수들의 유배지였던 반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도시에 지어진 첫 번째 주요 건물 역시 감옥이었다. 프리맨틀은 친환경 섬으로 명성 높은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로 향하는 경유지이기도 하다. 섬이 간직한 바다는 연둣빛 라군으로 단아하게 치장돼 있다. 서호주의 남쪽 해변에서는 에코투어의 천국이 열린다. 퍼스 남부의 지오그라피 베이 일대는 버셀턴, 얄링업 등 작고 매력 넘치는 도시들이 들어서 있다. 이 해변마을들은 서핑, 와이너리 투어, 바다표범 구경, 해변 숲 트레킹의 아지트로 사랑받는다. 뜨거운 햇살 아래 서핑을 즐기다가도 해 질 녘이면 전원 속 와인바에 앉아 레드와인 한 잔 즐기는 로망이 이곳에서 현실이 된다.
지구를 생각하는 서호주 여행
1. 자전거 타기
프리맨틀 인근 로트네스트섬은 호주의 대표적인 친환경섬이다. 섬에 닿으면 교통수단의 99%가 자전거로 채워진다. 로트네스트섬에서는 자전거를 타다 우연히 만나는 외딴 해변에서 스노클링 등을 즐길 수 있다.
2. 동물들과 교감하기
로트네스트섬 이름의 유래(rat nest)가 된 '쿼카'는 퍼스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사랑스러운 존재다. 웃는 듯한 깜찍한 외모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습성 때문에 최근 쿼카와 함께 셀카 찍기가 유행이다. 단, 섬 안에 사는 동물들을 만지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된다.
3. 원주민 체험
브룸 투어의 진면목은 '벙글벙글'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암지대는 숙소나 식당으로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 있다. 옛날 호주 원주민처럼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묵는 등의 친환경 체험들만이 가능하다. 먹을 것, 마실 것 등을 직접 챙겨가고 남는 것은 반드시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