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자
바위왕궁 시기리야의 마른 바람 앞에 선다. 불가사의인 바위산과 석굴사원을 오르는 사람들은 애처로운 맨발이다. 남쪽 해안, 파도 위 장대에 매달린 어부들은 바다의 풍경이 된다. 스리랑카는 베일에 싸인 외딴 섬나라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만 여덟 곳. 스리랑카의 중부에서 남부 해안으로 이어지는 도시들은 낯선 실루엣으로 다가선다.
[글·사진 서영진(여행칼럼니스트)]
담불라의 칸달라마 호텔 레스토랑은 창문이 유난히 넓다. 창밖은 담불라의 호수와 숲으로 채워진다. 호텔은 꽤 자연친화적이다. 나무 덩굴이 호텔 벽을 따라 오르고, 숙소로 향하는 복도에는 바위가 비쭉 솟아있다.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건축가 '제프리 바와'의 호흡이 담긴 호텔은 숲속에 웅크린 채 세계유산인 유적들과 균형을 맞춘다.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즐기던 여인이 창밖으로 응시한 건 호수와 숲만이 아니다. 녹색의 숲 너머 봉긋 솟은 바위산은 시기리야다. 세계 10대 불가사의로 여겨지는 스리랑카의 상징과 같은 유적이다.
세계 불가사의 '시기리야 바위왕궁'
부왕을 시해한 카사파 1세는 370m 시기리야 바위 절벽 위에 철옹성을 세웠다. 그것도 모자라 바위산 주변에 해자를 만들고 '사자의 목구멍'으로 불리는 바위 통로로 겹겹이 에워쌌다. 승려들의 수행지였던 바위산 정상에는 수영장, 연회장까지 갖춘 왕궁이 모양새를 갖췄다. 5세기 때 일이었고, 짧은 흥망의 과정을 겪었던 암벽왕궁은 19세기 후반 영국군 장교에게 발견되면서 14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기리야로 오르는 길은 녹록지만은 않다. 방어와 삶터 확보를 위해 조성했던 공간들은 물의 정원, 바위 정원, 테라스 정원이라는 말로 곱게 포장돼 있다. 영국 식민시절, 정복자에 의해 철제 계단이 설치됐고 그 철조물들은 세계유산의 한 가운데 생채기를 내며 가로지른다. 삭막할 것만 같던 육중한 바위산 동굴에는 가슴을 드러낸 여인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시기리야 미인도'는 부왕의 혼을 달래기 위해 춤추는 선녀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천년 세월을 넘어 정교함이 배어난다. 바위산 정상 왕궁터에 걸터앉으면 시기리야, 담불라의 평원과 산자락이 아득하게 내달린다. 시기리야에 오른 이방인 주위로는 먹먹한 감동만이 맴돈다.
왕조의 마지막 수도, 실론티의 '캔디'
스리랑카 중부는 문화의 삼각지대로 불린다. 담불라는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아, 캔디 등 옛 수도들의 교차로 성격이 짙다. 담불라 석굴사원에는 수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150여 기의 불상과 정교한 채색의 프레스코화가 남아 있다.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는 아누라다푸라에서의 1500년 세월을 접고 힌두교인 타밀족을 피해 폴론나루아로 수도를 옮긴다. 인구 3만여 명의 옛 수도 폴론나루아는 도시 전역이 불교 유적으로 채워진 세계문화유산이다. 폴론나루아를 벗어나 캔디로 가는 길은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를 알현하는 길이다. 해발 500m 들어선 캔디는 스리랑카의 정신적수도로 추앙받는 땅이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식민시대를 거치면서도 고유의 문화를 간직했던 캔디에 대한 이곳 주민들의 자긍심은 높다. 도시는 유럽풍 분위기가 완연하고,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불치사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도시 가운데는 왕조의 마지막 왕이 후궁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캔디 호수가 들어서 있다. 호수 위 언덕에는 부자들의 별장이 꽃송이처럼 매달렸다. 캔디는 실론티와 향신료의 최대산지로도 알려진 곳이다.
남부 해변, 장대에 매달려 삶을 낚다
스리랑카의 남쪽 해안으로 향하면 지난밤을 거룩하게 채웠던 잔상들은 사라지고 없다. 2차선의 덜컹거리는 도로는 인도양의 포말과 나란히 달린다. 이곳 바다는 파도가 성을 낼 때 더 매력적이다. 천년 불교 유적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단상들이 해변을 채운다. 벤토타 등 휴양지를 지나쳐 외딴 바다로 접어들수록 어촌 향취는 강렬하다. 파도가 가로막은 듯, 버스는 한 고즈넉한 마을에서 멈춘다. 외딴 아항가마 해변에서 맞이한 장면은 아득하다. 포구 옆에는 고깃배 대신 기다란 장대 10여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덤벼드는 검푸른 파도보다 검은 근육의 장정들은 장대 위에 허수아비처럼 매달려 있다. 어망에는 두서너 마리의 생선이 쓸쓸하게 담겨 있다. 스리랑카 남부의 독특한 장대 낚시는 거친 이곳 바다가 길러낸 삶의 방식이다. 파도가 험한 날에 배를 띄울 수 없었던 어부들은 장대에 올라 고기를 잡았다. 노을에 비낀 낚시질은 스리랑카의 풍광을 대변하는 이색 장면이 됐다. 장대 낚시터 옆으로는 어촌마을 꼬마들이 뒤엉켜 파도에 몸을 내던진다. 흰 포말이 천진난만한 미소들을 쓰다듬고, 짧은 시간 평화롭고 달콤한 전율이 흐른다. 아항가마 해변에서 바닷가 성채도시 갈레로 이어지는 길목은 낮은 담장의 집들이 이어진다. 14세기 아라비아 상인들의 교역항이었던 갈레는 서구열강의 지배 기간 요새 역할까지 겸했던 곳이다. 성채 내부에는 네덜란드 식민시절 지었던 유럽풍 가옥들이 옹기종기 남았다. 신구도시를 잇는 갈레 게이트의 좁은 골목 사이로는 세 바퀴달린 모터사이클인 오토 릭샤가 달린다. 여행자들은 나무가 성기게 얽힌 파스텔톤의 숙소와 노천식당에 몸을 기댄다. 해 질 무렵에 현지 주민들과 뒤섞여 등대, 깃발바위, 시계탑 등으로 이어지는 성채 위를 걷는 것은 가슴 뭉클한 동질감을 일으킨다. 스리랑카에서 맨 처음 지어졌다는 등대 아래는 꼬마들이 크리켓을 즐기는 정겨운 풍경이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갈레의 구시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스리랑카라는 이름에는 '신성한 섬나라'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곳에서의 감동은 구식 슬라이드를 넘기다 숨 막히는 광경과 맞닥뜨리는 기분이다. 눈에 익은 풍경이 반복되다가도 우연히 조우한 장면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지구를 생각하는 스리랑카 여행
1. 공정여행
스리랑카는 공정여행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곳이다. 여행자들은 '착한여행'으로 불리는 공정여행을 스리랑카 투어에서 몸소 체험한다. 공정여행은 현지인에게 이득이 되는 여행, 환경을 보호하고, 문화를 존중하는 여행이다. 호화로운 외국계 호텔이나 레스토랑 대신 현지 게스트하우스와 식당을 이용하며 주민들의 삶과 어우러지는 것.
2. 쉬어가기
폴론나루아의 유적을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거나, 담불라의 시장을 여유롭게 방문하는 일은 늘 뜻깊다. 꼬마들이 뛰노는 남부해안에서 함께 일몰을 마주하는 시간 역시 소중하다. 스리랑카에서는 차밭, 향신료 밭과 연계된 친환경 숙소에서 냉장고, TV 등 전자용품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자연 속에서 하룻밤 묵는 여행이 인기다.
3. 플라스틱 ZERO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스리랑카의 바다는 최근 플라스틱 쓰레기로 신음을 앓고 있다. 스리랑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은 최대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국으로 알려져 있다. 스리랑카 해안가 여행 때는 1회용품 등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순박한 자연을 지키는 데 일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