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봉계주
1987년, 만으로 서른 살이던 엄마는 대구의 어느 한 병원에서 나를 낳았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2017년, 거제의 한 산부인과에서 보승이가 우리 부부 곁을 찾아왔다.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엄마-나-보승이는 꼭 30년간의 세월을 건너뛰어 서로를 만나게 된 것이다.
[글·사진 기술개발처 기술협력부 서성진 직원]
아빠가 되고야 짐작해보는 부모님 마음
원체 살갑지 못한 아들이던 나는 한 번도 부모님께 당신들의 젊은시절에 대하여 여쭤본 적이 없었다. 아직도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죽할까. 결혼을 앞두고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부모님의 앨범을 함께 펼쳐보며 부모님께도 젊은 시절이 있었노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로 불효자였던(물론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나에게 보승이가 찾아오고, 그렇게 황망히도 아빠라는 존재가 되고 나니 부쩍 부모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보승이 나이일 때 우리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였을 텐데,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키워내셨을까? 보승이가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처럼,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에게 그런 존재였을까? 이런 생각들 말이다. 보승이는 2017년 2월 21일, 예정일을 5주나 앞두고 2.46㎏의 작은 몸으로 태어났다. 갓 태어나 울음이 터진 아가에게 아빠 목소리를 들려주면 안정감을 찾고 울음을 그친다길래 매일 밤 뱃속의 보승이에게 노래를 불러줬었는데, 미숙아에다 조산아의 몸으로 태어난 보승이는 아빠가 채 노래를 불러줄 틈도 없이 인큐베이터로 들어가 세상을 맞이했다. 지금에야 "엄마아빠를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라며 추억처럼 이야기하곤 하지만, 당시에는 참 하루하루가 간절했다. 이제는 제법 고집도 생기고 반항도 하는 세 살배기 개구쟁이라 엄마아빠를 난처하게도 하지만, 힘들게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준 보승이에게는 항상 고마움이 앞선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이는 주변 환경이 바뀔 때마다 성장통을 앓는 건지, 한번씩 병치레를 해서 엄마아빠를 고생시키곤 했다. 조리원을 나와서 처음집에 왔을 때도,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했을 때도. 작년 이맘때쯤에는 아빠가 이직을 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폐렴에 걸려 입원까지 해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병실에 갇혀 심심한지 종일 칭얼대는 아이와 놀아주는 일도 고되었지만, 하루에 한 번씩 링거 바늘을 새로 꼽기 위해 간호사실을 방문하는 일이 가장힘든 일과였다. 겁에 질려 발버둥 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가며, 행여 그 고사리 같은 작은 손에 두 번씩이나 바늘을 꽂아야 하는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는 보승이를 꼬옥 붙잡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열나는 것 정도야 흔한 일이라는데도 그렇게나 힘들었는데, 두 살배기 아들에게 내려진 시한부 선고를 듣고 돌아오시던 우리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두 살이 되던 해, 아직 젖먹이 아들에게 젖을 먹이던 엄마는 품속에 안겨있는 아기의 시선이 묘하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단다. 행여나 어디 잘못된 건 아닌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의사가 운영하는 동네 안과에 가서 아이의 진료를 받았지만, 요새 엄마들은 애들을 너무 과보호한다는 핀잔만 듣고 돌아온 엄마. 의사가 그렇게 말하니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지만 께름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엄마는 큰 병원에 찾아가서 검사를 요청하셨다. 그리고 들려온 청천벽력같은 소식. "아이의 오른쪽 눈에 병이 생겼는데, 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암이라면 생명이 위태롭고, 아니라고 해도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 자세한 결과는 며칠 뒤에 검사결과가 나오면 알 수 있으니 일단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엄마는 하염없이 우셨단다. 엄마가 우니 등에 업힌 나도 따라 울고, 그렇게 모자는 눈물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불행 중 다행으로 암은 아니었고,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느덧 아빠가 되어 이렇게 글을 쓴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던 즈음 이 이야기를 딱 한 번 하셨다. 그 뒤로 다시 꺼내신적은 없지만, 요즘 보승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엄마가 해주신 그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그때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였고, 그때 내 나이가 지금의 보승이 나이였는데…. 나는 보승이가 조금만 열이 올라서 칭얼대도 이렇게 안쓰러운데 그때 엄마는 어떤 기분이셨을까. 나는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이제 겨우 3년차 초보 아빠지만,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더라. 혼자자란 줄 알았던 나는 엄마가 없이는 밥 한 숟가락 떠먹지 못하던 아기였음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이 어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인지를. 고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너의 미소에 나의 세상이 얼마나 환해지는지를. 그리고, 나도 엄마에겐 그런 존재일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음 주에는 엄마의 생신이 있다. 아마도, 늘 그랬듯이 보승이를 데리고 같이 식사를 하고, 용돈을 드리며 축하의 말을 전하는 저녁이 되겠지. 올해는 그동안 드리지 못했던 말을 꼭 전해야겠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열심히 키울게요. 사랑해요, 엄마."
다음 필봉계주 주자는 경제경영연구소 도현우 연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