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인천

인천이라는 붉은빛의 바다

인천은 개항과 식민의 역사가 새로운 현대적 시간과 만나는 장소이다.
모든 것으로 열려있는 바다가 품은 인천의 유적들을 찾아갔다.

📝&📷 이광호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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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에서 간도에서의 이주해온 여주인공에게 인천은 새로운 기회와 억압이 공존하는 장소였다. 이 소설에서 인천은 뿌연 연기 속에 잠겨있어 전등불만이 껌뻑거리는 새벽, “각반을 차고 목에 타월을 건 노동자들이 일터로 나아가는” 노동자의 도시로 묘사된다. 개항의 최전선에 있었던 인천은 식민지 근대의 공장지대가 구축된 곳이었다. 인천은 새로운 근대적 활력이 넘실거림과 동시에 다른 형태의 식민 착취가 벌어지는 장소였다. 2024년의 인천은 강경애의 인천과는 너무 먼 역사적 시간을 지나왔지만,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으면서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인천을 걷는다는 것은 그러한 시간의 잔존을 체험하는 일과 같다.

청관거리에서 만난 옛 조선의 개항기

옅은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초여름 날 인천역에 도착했다. 인천역에서 거리로 나가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차이나타운의 화려한 ‘패루(牌樓)’이다. 이 웅장한 중국식 대문은 중국인이 모여 사는 곳에서 볼 수 있는 탑 모양의 조형물이다. 패루 안으로 들어가면 시간은 불쑥 개항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차이나타운 혹은 ‘청관거리’로 불리는 이곳은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로, 개항 이후 청나라 조계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개항과 임오군란 이후 많은 중국인들이 인천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천항을 출입하는 중국 선박들이 급수 등을 위해 모이면서 이곳에 화교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후 청국이 영사관을 설치하자 화교들은 상업과 생활을 위해 영사관 부근에 점포와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청관’의 영향력과 상권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급격히 약화되어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다. 침체되었던 차이나타운의 상권을 살린 것은 2000년에 인천시가 중구를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재정비하면서부터이다.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에 배인 인천의 혼종성

차이나타운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이 보인다. 이 계단은 1883년에 획정된 일본 조계와 1884년에 설정된 청국 조계의 경계를 나누는 계단이다. 계단을 중심으로 식민지 시대의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배치돼있다. 청국과 일본의 조계지 경계란 인천 지역 식민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다만, 변화가 있다면 지금 이 계단에는 중국 청도에서 기증한 거대한 공자상이 세워져있다는 점이다. 계단 양쪽으로 줄지어진 석등과 조명등, 공자상 오른쪽에 위치한 사찰의 연등과 거대한 공자상이 어우러져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계단 위로 이어진 붉은빛을 따라가다 보면 《삼국지》에 나오는 77가지 장면을 요약해 전시한 150M에 달하는 벽화거리를 만난다. 마치 삼국지 테마 가설무대 같은 느낌이다. 원색의 벽화들의 향연은 이 거리 전체를 붉은빛의 전시장으로 만든다. 한국식 짜장면이 탄생한 중국집 ‘공화춘’이 있던 자리에는 짜장면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음식의 기원을 갖고 있지만 ‘한국화’된 대표적인 음식인 짜장면의 독특한 혼종성은 개항이라는 강제된 근대화로부터 시작된 인천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한다.

자유공원 언덕에서 만나는 카니발의 풍경

응봉산 언덕을 계속 올라가면 자유공원을 만나게 된다. 응봉산의 원래 이름은 매의 부리를 닮았다 하여 ‘매부리산’이었다. 응봉산은 그것의 한자 이름이다.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한 응봉산은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조계지가 되면서 활력을 띄게 되었다. 이 언덕은 축항과 월미도까지 조망할 수 있는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고, 이곳에 놓인 맥아더 장군의 동상은 역사적 상징성을 더한다.

1888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자유공원은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파고다공원(탑골공원 1987)보다 먼저 세워진 것이다. 자유공원에는 동호인 모임이 한창이었다. 붉은 옷의 운동복을 함께 입고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율동을 펼치는 모습은 전혀 예상 밖의 장면이라 약간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맥아더 동상 머리에 비둘기 한 마리가 이 모든 장면들을 굽어보며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새의 시선은 자유공원 언덕 너머의 바다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자유공원은 1919년 4월 2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렸던 역사적 장소이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으로 그 상징성이 변했다. 언덕 조금 아래에 있는 ‘한미수교100주년기념답’은 숲에 둘러싸여 있어 금방 드러나지 않았는데, 거대하고 뾰족한 형태의 구조물이 숲속에 있다는 사실이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1950~1960년대에 공원 주변에는 찐빵 장수와 냉차 장수, 장기와 주사위 놀이를 유도하던 야바위꾼, 사주팔자를 봐주는 판수와 점쟁이들이 진을 치고 있어 카니발적인 장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웠던 서민적인 축제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 안에 갇혀있는 새들과 ‘학도의용대기념탑’ 맞은편에 놓인 잡다한 인형들이 그 시절의 잔존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고릴라에서 인디언에 이르는 인형들을 왜 이곳에 늘어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난해한 풍경은 이 거리의 한 시절을 환기시켜준다.

오래된 시간의 창고로 들이치는 붉은 바다

자유공원을 가로질러 응봉산 언덕을 내려가면 홍예문을 만날 수 있다. 홍예문이라는 이름은 ‘문의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반원형 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응봉산 중턱을 깍아내고 석축을 쌓아올린 아치형 돌문은 홍예문 1길과 2길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돌문은 거대한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보이는데, 돌문 저편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알 수 없어 신비한 느낌을 자아낸다. 인천 항구와 한국인 촌의 경계지였던 이곳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조계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한국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1908년에 완성했다. 그 당시 흙을 나르던 인부 50여 명이 희생되는 사고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인천항과 전동을 바로 연결할 수 있는 이 관문이 생김으로써, 인천항과 그 일대 조계지의 일본인들은 더 빠르게 동인천역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의 홍예문 주변에는 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어서 여름 과일과 빙수, 냉차를 파는 장사꾼들로 붐볐다고 한다. 이 주변에는 청국영사관 회의청, 일본 제1은행 등이 있었다. 지금 홍예문 주변은 상대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홍예문 앞에 119센터와 철학관과 중국집이 나란히 있는 광경은 돌문 위를 지나간 아프고 기이한 시간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교통의 요지였던 이곳에 지금은 오고 가는 차들이 많지 않다. 가장 많이 지나가는 것은 배달 오토바이이다. 행사용 화환을 실은 트럭이 홍예문을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대면한다. 그 순간, 돌문의 저편에 누운 바다, 저녁이면 차이나타운의 붉은 빛으로 몸을 바꿀 그 바다가 그려진다. 붉은 바다는 자유공원 언덕 아래 개항장 문화지구의 유서 깊은 건물들 사이를 흐르고 있다. 오래된 시간의 창고 사이로 언제나 새로운 바다가 들이닥치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 문헌'
최희영 《삼치거리 사람들》, 썰물과 밀물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의 교통물류 중심지, 경기 인천》, 경인문화사